황덕호 재즈컬럼니스트, 키스 자렛을 논하다

[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허비 행콕과 펫 메스니에 이어 또 다른 ‘재즈의 거장’인 키스 자렛까지. 2011년 상반기, 한국 서울에서는 ‘재즈 천국’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존하는 최고 재즈 거장들의 내한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즉흥 재즈 연주의 1인자’로 손꼽히는 키스 자렛의 내한 공연이 열렸다. 한국 최고의 재즈 컬럼니스트 황덕호 씨가 애정이 듬뿍 담긴 공연 리뷰를 본지에 보내왔다.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지난 해 10월, 국내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잊지 못하고(당시에는 게리 피콕, 잭 드조넷과 삼중주 편성으로 내한했다) 5개월 만에 다시 서울 무대에서 독주회를 가진 키스 자렛(Keith Jarrett)이었지만 그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더군다나 가능한 이 공연을 음반으로 발매하기 위해 자렛은 녹음 장비를 동원했는데 세종문화회관의 모든 냉방기는 소음방지를 위해 꺼져 있는 상태였다. 객석에서도 다소 덥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아마도 조명을 받고 있는 연주자의 체감 온도는 훨씬 높았을 것이다.
1970년대 초반부터 아무런 레퍼토리를 정하지 않은 채 장시간의 즉흥연주로 재즈 피아노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던 이 명인의 연주는 2000년대 들어 짧은 모음곡 형식으로 그 모습이 바뀌는 중이다. 그런데 이번 내한 무대에서는 그 곡의 길이가 더욱 짧아졌고 어떤 곡에서는 악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불안하게 끝을 맺는 모습도 보였다. 즉흥연주의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는 정신적 집중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어지던 그의 장대한 즉흥연주가 어느덧 먼 옛날의 모습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안타까웠다. 그간 그리 좋지 못했던 그의 건강과 어느덧 흘러버린 세월을 곱씹어야 했다. 더군다나 그는 곡 중간에 건반의 낮은 음을 두드리며 음정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고 잠시 대기실로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한 공연 관계자는 그가 ‘너무 덥다’고 말했다고 했다). 2부까지 여덟 곡으로 이어진 그의 즉흥 모음곡이 끝나고 자렛은 무대 뒤편으로 결국 사라졌다. 하지만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청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기립박수로 자렛을 불렀으며 그때마다 자렛은 무대로 나와 진심 어린 인사로 답례했다. 하지만 앙코르 연주가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러기를 몇 차례, 그가 드디어 피아노에 앉았다. 처음에는 블루스 즉흥연주. 하지만 끝나지 않는 커튼 콜. 그 답례로 이어진 스탠더드 발라드. 이때 그는 자신의 기교를 결코 내세우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라면, 특히 많은 관중 앞에 앉은 연주자라면 응당 그들에 대한 답례로 한번쯤은 화려한 아르페지오를 펼쳐 볼만도 한데 그는 독하게도 그걸 참고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미 그 세계를 떠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바흐의 평균을 매우 천천히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손끝은 오로지 작품의 아름다움을 깊이깊이 음미했고 그 소리에 아마도 청중들은 마음속에 어슴푸레한 저녁노을을, 반짝이는 별들을,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을 떠올렸을 것이다.
무려 네 번째 앙코르 ‘날 떠나지 마세요 Don't ever leave me’가 끝난 뒤 박수 이전에 비명과도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청중들은 그를 놓지 않았다. 그는 소문대로 예민하고 또 그만큼 피곤한 상태였지만 동시에 우레와 같은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과 감사함이 함께 묻어났다. 객석에서 누군가 “사랑해요, 키스 자렛!”을 외치자 그는 조지 거슈인의 ‘사랑해요, 포기 I Loves You Porgy’의 첫 소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가 연주 할 때면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곡이 시작 되자마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그 소리 역시 피아노 소리와 뒤섞이며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야구로 치자면 9회 말 대역전극이었다. 연주를 마친 뒤 자렛은 오랫동안 기다려 주신 팬들에 대해 고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눈물지었다. 그간 키스 자렛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내 무대에 오지 않은 것은 국내 재즈 팬들에게 일종의 상처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것이 우리만의 짝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새삼 알았다. 일견 까다로운 그의 내면에 흐르는 음악에 대한 뜨거운 헌정과 청중들에 대한 감사를. 그리고 어찌하여 사람들은 ‘까도남’(까다로운 도시 남자)에게 매혹되는가를. 글_황덕호(재즈컬럼니스트)태상준 기자 birdcag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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