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重 최초의 대형 선박 건조기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전경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어느 조선소나 마찬가지겠지만 첫 선박을 건조할 때에는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다.삼성중공업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김영주 전 거제조선소장(전 상무)가 회사 30년사에 기고한 당시의 경험담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가 문을 연 것은 1977년.‘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처음 조선사업에 뛰어들었을 때의 상항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고 ‘반’이 될만한 ‘시작’을 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55만평 부지에 채 완성되지 않은 도크, 아직 90%의 진척도에 머물러 있던 각종 작업장, 누런 황토물이 휘날리는 야드···. 당시 사원들의 작업복이 흙먼지가 묻어도 표가 잘 나지 않도록 황토색으로 정해진 사실만 봐도 그 때 작업장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었다.당시 상황은 이렇게 열악했지만 사원들의 마음속에는 하루 빨리 조선소 정비를 마쳐 1979년 하반기부터는 선박을 건조하고 말 것이라는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넘쳤다. 이를 위해 밤낮없는 노력이 계속됐고, 덕분에 목표로한 1979년에 들어서는 어느 정도 중형 조선소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수주 따내는 일이 당면과제로 부각됐다. 1978년 한해 만 300여건의 수주문의가 있긴 했지만 끝내 문의로 그치고 말았고, 정작 제1호 수주의 꿈은 실현될 기미가 없었다.드디어 1979년 4월 19일, 모든 사원들이 목메어 기다리던 첫 해외수주 계약이 성사됐다. 2100t급 석유시추보급선 2척(1002, 1003호선)을 호주 벌크십으로부터 수주한 데다 주식회사 범양으로부터 2만t급 유조선(1001호선)을 수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제조선소는 일순 감격의 환호성으로 뒤덮여졌다. 그 함성이 잦아들기가 무섭게 작업이 시작된 바, 인도일자 관계로 1002·1003호 석유시추보급선부터 건조에 착수했다.기공식이 열린 것은 그해 12월, 돼지머리를 놓고 절을 하는데 호주 선주 감독관의 우리식 큰 절 모습이 어찌나 우스웠던지. 미리 몇 번 연습을 시켰는데도 자꾸 엉덩이를 치켜들고 머리만 굽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스운 모습도, 점잖게 웃고 있는 돼지머리도, 기공식에 참가한 모두의 눈엔 그저 정겨운 정경으로만 여겼다.석유시추보급선은 석유시추선에 각종 물자를 지원 보급하고 기타 작업을 지원하는 작업선으로 배는 작지만 구조와 기능이 복잡해서 경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상당한 애로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선실 외벽 철판이 너무 얇아서 용접 후에 일어나는 굴곡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중후판에서는 잘 먹혀들었던 라인 히팅(Line Heating)도 6mm 정도의 박판에서는 좀체 먹혀 들지가 않았다. 게다가 걸핏하면 찾아와서 “신생 조선소에다 중요한 일을 맡기는 바람에 자칫하면 후일 책임질 일이 많게 생겼다”면서 불평을 늘어놓는 선주감독 때문에 작업은 더욱 고달프기만 했다.
이런저런 고비를 넘긴 후 드디어 완성된 배를 시험하는 단계에 왔다. 석유시추 보급선은 작업선이므로 견인 테스트가 필수적이었다. 주기관 4/4 부하에서 200t의 견인력이 나와야 하는데, 로드 셀(Load Cell)을 설치할 위치가 마땅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빈 드럼 20개를 엮어서 그 위에 상판을 깔고 로드 셀을 설치한 후, 한쪽은 안벽 말뚝에다. 다른 한쪽은 배의 윈치에 걸어서 준비를 했다. 준비 완료, 테스트 실시! 엔진 파워 1/4, 2/4, 3/4···, 점점 파워를 올리는 동안 셀에는 로드가 걸렸고, 드디어 3/4 파워를 조금 지나자 갑판 위에서 “200t, OK!”라는 신호가 왔다. 선상에 있던 우리는 기쁨의 함성을 질렀는데, 감독관은 파워를 끝까지 올려보라고 성화였다.하는 수 없이 풀 파워(Full Power)를 지시했고 다시 엔진이 힘을 내는 순간이었다. 장력(張力) 때문에 배의 방향이 약간 어긋나자 로프가 그만 갑판 옆으로 쏠리면서 로드 셀 물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방수 셀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에 빠지는 순간 전기회로가 끊어지면서 곧바로 셀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선주감독이 펄쩍 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3/4파워가 지나서 이미 OK 신호를 받았으니 측정이 끝난게 아니냐”는 우리측 주장과, “갑판 위에서 신호를 보낸 사람이 삼성 사림이니까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선주측의 주장이 맞서, 양측은 거의 한판 싸움을 불사할 태세에까지 이르렀다.하지만 증빙할 자료가 없는 마당이었으니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물러설 수 밖에 없었고, 처음부터 그 고생을 다시 감수해야만 했다. 셀을 다시 구해서 재시험을 거쳤고 기어이 선주감독의 입에서 “OK!” 소리가 나오게 만들기는 했지만, 당시의 가슴 아픈 기억은 두고두고 지울 길이 없다. 그 “OK!” 소리만큼 간절히 기다려지던, 그래서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목소리가 또 있을까.어떻게든 첫 번째 수주만 이뤄지면 열과 성을 다해 매달릴 각오로 손에 작업도구를 든채 지내던 그 시절, 그 같은 의욕과 각오가 있었기에 선박 건조 1호는 우리에게 비로소 ‘시작이 반’일 수 있었던 것이다.<자료: 삼성중공업>채명석 기자 oricm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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