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도 우리국민 피랍 여러번 시도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삼호 주얼리호를 납치했다 우리 군에 생포되거나 사살된 소말리아 해적 13명 모두의 인적사항이 확인됐다. 특히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살자 8명 가운데는 두목과 부두목이 포함돼 향후 수사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1명을 제외하고, 확인된 해적들의 나이는 19~29세의 청년이었으며 모두 소말리아 푼틀랜드 지역에 주소를 둔 것으로 드러났다.민간인 어선을 피랍하는 것은 소말리아 해적뿐만 아니라 북한군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수법이다. 군 관계자는 2일 "소말리아 해적뿐만 아니라 북한에 피랍된 국내 어민 428명도(2008년 현재) 아직 송환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판 ‘군사정전위원회 편람’(제8집)을 기초로 작성한 ‘휴전 이후 북한 주요 도발 내용 현황’에 따르면 북한의 민간 도발 행위 가운데 가장 많은 유형이 어선·어민 납치다. 어부들이 해안에서 조업하다 기관고장이나 실수로 북방한계선(NLL)을 월선하거나 공해상에서 조업 중에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북한은 ‘자진월북’ 또는 ‘간첩행위자’로 몰아 송환을 거부하곤 했다.
납북 어부는 55년 5월 28일 대성호 선원 10명이 피랍된 것을 시작으로 61~66년 사이에는 매년 한두 척의 어선들이 나포되곤 했다. 그러다 남북 간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67년에 어선 67척과 어부 352명이 무더기로 납북되기 시작, 68년에는 어선 100척과 어부 805명이 납북됐다. 어선 피랍사건은 서해안보다 동해안에서 더 많이 발생했으며, 최근까지 약 37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직 428명(2008년 현재)이 송환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민간인이 탑승한 항공기를 납치하고 폭파하기도 했다. 58년 2월 15일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KNA(창랑호)가 평택 상공에서 북한 무장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돼 평양 순안공항에 강제착륙당했다. 민항기에 대한 첫 번째 도발로서 우리 국회가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6·25참전 16개국에 보내는 등 강력히 항의하자 탑승자 26명 전원을 돌려보냈다.69년 12월 11일에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을 태우고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오던 KAL(YS-11)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돼 원산으로 기수를 돌렸다. 납치 66일 만인 70년 2월 14일 탑승자 중 승객 39명만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고 승무원·승객 12명(납치범 포함)의 송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5분쯤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KAL858기가 공중 폭발해 승무원 20명 등 115명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당했다. 중동 건설근로자들이 많이 탑승한 이 KAL기는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 북한 노동당중앙위원회 조사부 소속의 특수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폭파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김현희는 바레인에서 체포돼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북한의 도발 중에는 국내로 침투한 간첩이 민간인을 납치하거나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되는 사례도 있다. 77년 8월 전남 홍도에서 이민교(당시 18세)·최승민(17세) 군이, 78년 8월 10일 역시 홍도에서 이명우·홍건표(이상 당시 17세) 군이, 8월 15일 군산 선유도에서 김영남(당시 16세) 군이 고교생 신분으로 북한의 공작선에 의해 해안가에서 납치된 바 있다. 이 중 김영남 군의 경우는 80년 6월 충남 보령으로 해상 침투 중 검거된 간첩 김광현에 의해 확인됐다. 또 홍건표·이명우 군은 95년에 검거된 간첩에 의해 북한에서 홍 교관 등으로 불리며 활동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외에서 납치된 예는 71년 서독에서 납치된 유성근 씨 일가족 4명이 첫 번째로 꼽힌다. 78년 4월 13일에는 노르웨이에서 고상문 씨가, 87년 7월 20일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이재환 씨가 납치됐다. 중국과의 교류가 늘어난 후인 95년 7월 9일에는 안승운 목사, 99년 9월 7일에는 무역업자 장세철 씨, 2000년 1월에는 옌지에서 김동식 목사 등이 납치됐다.지난 2007년 7월 12일, 관광객으로 북한 금강산을 찾은 주부 박왕자 씨가 북한군의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숨졌다. 박씨가 금지구역에 들어갔다는 것이 북한군이 내세운 총격 이유로서 금강산 관광 이후 첫 민간인 피살사건으로 기록된다.
대통령을 없애려는 시도도 여러번 있었다.북한은 68년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124군 부대 소속의 무장공비 31명을 침투시켰다.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시도된 첫 번째 도발이다.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은 국군 복장을 하고 미군이 경계를 관할하는 휴전선을 넘어 1월 21일 서울 세검정까지 침입했으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발각됐다. 총격전이 벌어져 무장공비 가운데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우리 측 전사는 34명. 생포된 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레”라고 말한 김신조는 현재 목사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74년 8월 15일, 8·15 광복절 경축행사에서 일본 조총련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쏘는 저격을 시도했다. 박 대통령은 무사했으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흉탄을 맞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83년 10월에는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폭탄 테러가 자행됐다. 당시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 중 첫 방문국인 미얀마(버마)를 방문한 전 대통령은 아웅산 국립묘지에 참배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전 대통령이 도착하기 직전 폭탄이 터져 대통령은 화를 면했지만 서석준 부총리 등 수행원 17명이 숨지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양낙규 기자 if@<ⓒ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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