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마비 장애 딛고 일어선 김영주 삼성화재 보험설계사
27세 꽃다운 청춘을 앗아간 사고… 숙명을 거스른 ‘행복찾기’세상 살기가 갈수록 각박하다고 합니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도 이젠 떨쳐버려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모든 것이 힘겹지만 그래도 세상 살맛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살맛나는 일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기대합니다. 2011년 신묘년(辛卯年) 새해를 맞아 힘겨운 삶을 극복하고 새 삶을 찾아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훈훈하고 가슴 찡한 이야기를 시리즈로 집중 조명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전신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보험업계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김영주(40·삼성화재 이천지점 보험설계사·//blog.daum.net/21konan)씨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사고 인생을 바꾼 교통사고“어느 가을날 창문 틈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너무 저주스러웠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졌으면 하는 나쁜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참담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외롭고 힘겨운 삶이지만 다시 용기를 내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숨죽이고 울다 지쳐 스러진 아들 모습에 안타까워 눈물 흘리시던 노부모님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습니다.” 27살 꽃다운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신마비(장애1급) 중증 장애인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처지를 비관해 여러 차례 자살까지 생각했던 김영주씨의 회상이다.김씨는 10여 년 전만 해도 스킨스쿠버와 암벽등반을 즐기던 전도유망한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1999년 1월18일 늦은 밤 일어난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김씨는 직장 동료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함께 타고 귀가 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목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결과는 참담했다.목 이하로 내겨오는 신경이 손상되어 전신마비가 됐고, 결국 1급 장애인이 됐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 아래 신체는 감각을 잃었다. 평생을 누워서 지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눈만 뜨고 있을 뿐 제 몸 어느 한 구석도 맘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대소변 기능도 마비되어 소변이 차면 방광에 ‘넬라톤’이라는 줄을 집어넣어 소변을 빼야 했습니다. 대변 역시 3일에 한 번 관장약을 써서 침대에 누운 채로 봐야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연로하신 부모님이 다 하셨습니다. 얼마나 큰 불효입니까.”무엇보다 사고 직후 3개월간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해야 하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누워서 밥을 먹는 일과 TV를 보는 일이 전부였다. “정말 절망감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스포츠를 워낙 좋아했던 제가 교통사고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숨을 쉬고 밥을 먹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죠. 죽고 싶었습니다.”그는 여러 차례 자살도 생각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다 자살은 건강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극복 누워 있던 내게 찾아온 PC김씨는 2년 여 동안의 고립 생활을 청산하고 세상 밖으로 나갈 것을 결심한다. 하루 종일 TV 리모컨만 붙잡고 살던 그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형 영진(41)씨가 구입해준 PC를 활용한 세상 밖과의 소통이었다. “정말 지옥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홀로 방 안에 누워 있으면 꼭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에게 유일할 벗은 창 밖에 흐르는 구름과 TV에서 흘러나오는 방송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형이 방에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동생이 측은했는지 중고 PC를 사가지고 오셨지요. 세상과 소통해서 용기를 얻으라는 생각이었습니다. PC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창이었습니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어 입에 막대기를 물고 했지만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그는 PC를 통해 세상과 소통을 했고 우연히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정범진 검사의 얘기를 접하게 된다. 정 검사는 미국 로스쿨에 다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지만 이를 극복하고 검사로 활약해 당시 큰 화제를 모았던 인사다.“우연히 PC에서 정범진 검사의 스토리를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저와 비슷한 처지더라구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전신마비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가 승소율 90%라는 명검사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정 검사님의 인생 스토리를 보고 용기를 얻었지요.”탈출 세상 밖으로 나서다정 검사의 활약상에 감동받은 그는 잃어버린 삶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에 세상 밖으로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 도우미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지자체에서 운용하고 있는 장애인 도우미 제도는 당시만 해도 활발하지 않아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우선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시청 등 지자체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공허한 메아리가 되돌아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형편이 어려워 돈을 주고 활동 보조인의 도움을 받을 입장도 아니었지요.”그는 활동 보조인이 없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 했다. 자원봉사자나 후원자를 수소문했지만 허사였고 경제적 여유가 없어 유급 보조인도 둘 수 없었다. 장애인의 취업을 알선하는 곳마저 ‘스스로 활동이 가능한 장애인’만을 원했다. 그렇게 2년여 간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이곳저곳 문을 두드려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사회의 반응이었다.
1996년 여름 김영주씨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건강한 모습으로 스포츠활동을 했을 당시 모습.
도전 첫 월급의 감격결국 그는 스스로 돈을 벌어 세상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젊고 건강한 사람들도 IMF 외환 위기 한파로 직장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1급 장애인인 그가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길은 불가능해 보였다.그래서 생각한 게 보험업이었다. 타고난 긍정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을 밑천으로 영업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더욱이 교통사고 경험을 살려 자동차 보험 등을 파는 보험 맨으로 변신하면 좀 더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보험업 진출은 생각처럼 그리 녹록치 않았다.“우선 지인의 도움으로 한 보험사에 전화를 걸어 취업을 하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그쪽에서는 반갑게 맞아주며 이력서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 정성껏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일할 곳이 아니라는 얘기가 되돌아 왔습니다. 몇 번이고 이곳저고 이력서를 넣고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지요.”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그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한번 같이 일해 봅시다.”그는 아직도 그 한 마디 말을 잊지 못한다. 삼성화재 이천지점 관계자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는 무엇보다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2004년 1월 취업에 성공한다. “첫 월급으로 140만 원이 통장에 들어온 것을 보고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 중에서 100만 원은 저를 도와주던 활동 보조인에게 주고 달랑 40만 원 밖에 남지 않았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스스로 돈을 벌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현재 김씨는 활동 보조인이 승용차에 태우고 서류를 챙겨주는 등 업무를 도와주고, 김씨는 지역 행사 현장 등을 찾아다니며 영업 활동을 한다. 어깨 이하로는 감각이 없고 팔·다리도 움직일 수 없지만, '마우스 스틱'이라는 도구를 입에 물고 컴퓨터 키보드를 친다. 김씨는 “자판을 다 외워서 빨리 치면 분당 100~150타는 나올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무엇보다 스스로 노력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다. 특히 첫 월급을 탔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기뻤다고 한다.“첫 월급을 받았을 때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젊고 건강하던 시절 당당하게 받았던 월급에 비하면 아주 적은 돈이었지만 제2의 인생을 시작해 받아본 월급이어서 감격스러웠습니다. 그의 요즘 평균 월급은 130만 원 정도다. 활동 보조인에게 지급하는 돈만 한 달에 60만 원(정부 보조금 약 55만 원 제외)이라 남는 게 그리 많지 않다. 남는 돈은 고객에게 선물을 보내는 등의 개인 영업비로 쓰고 부모님 용돈도 드린다.“PC를 통해 전신장애를 극복한 한국계 미국인 정범진 검사의 얘기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죠.”배신 활동 보조인의 사기 그렇게 열심히 살던 그도 늘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손과 발이 되어 주던 활동 보조인이 갖고 있던 그의 중고 자동차와 현금 150만 원을 몰래 훔쳐 달아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자동차와 활동 보조인을 잃은 그는 며칠간 잠도 못자고 고민에 빠져 살아야 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돈을 갖고 사라진 사람을 찾아 중고 자동차를 돌려받는 것으로 일단락했지만 그는 돈보다 더 큰 것을 잃었다며 씁쓸해 했다. “돈은 열심히 해서 벌면 되지만 형처럼 따르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나니, 세상이 참 싫었습니다. 물론 오죽했으면 1급 장애인의 돈을 훔쳐 달아났겠냐는 생각도 하지만 ‘벼룩의 간’을 빼먹는 현실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용서하기로 했습니다.”그는 그 일로 인해 급여가 평소보다 50% 이상 줄어 한동안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다. 희망 새 희망을 노래하다그는 최근 좋은 일이 하나 생겼다. 김씨의 ‘든든한 다리’ 역할을 해주는 새 전동 휠체어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얻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전동 휠체어 구매 보조금을 지원해주지만 보통 제품들은 무게가 80~150㎏에 달하고 승용차에 싣기가 어려워 이동만 가능하고 일을 하기에는 어렵다. 그래서 김씨는 비싼 돈을 써서라도 가볍고(약 40㎏) 반으로 접기도 편한 전동 휠체어를 외국에서 구입(약 700만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근 방광 결석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고 기흉(폐를 둘러싼 흉막에 공기가 차는 병)이 있는 어머니 병원비까지 대야 할 처지라 고민이 컸다. 다행히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또 그는 오래 전부터 꿈꿔온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장애인들의 힘겨운 삶을 소개하고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란다.“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지난해 제가 쓴 수기를 보고 한 비장애인이 자살을 하지 않은 일이 있어요. 얼마나 다행입니까.”
김영주씨의 손과 발이 되어준 활동보조인 백성호(46·맨 오른쪽)씨와 박상욱 삼성화재 이천지점장과 함께.
행복 결혼 그리고 사랑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그는 요즘 여자 친구와 데이트에 푹 빠져 있다. 결혼은 아직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4년여 간 사귄 여자 친구와 영화도 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놓고 토론도 하고 행복하단다. "그녀와 결혼을 할 거냐”는 질문에 ‘노코멘트‘ 했다. 사랑은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좀 더 고민을 해야 봐야 할 것 같다고 말끝을 흐렸다. “전신장애를 가진 사람의 수명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대소변을 연로하신 부모님이 대신 받아주고 고생하는 걸 보면 몸서리 처질 정도로 싫지만 열심히 살 생각입니다. 불행은 그 누구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갖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 합니다.”삼성화재, 장애인식개선사업 큰 효과최근 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삼성화재가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식개선사업’에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기업들이 구호로만 외치는 일회성 사업이 아닌 실질적인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부터 삼성화재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한다는 취지로 시작한 이 사업은 장애인의 사회 적응과 비장애인들의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실제로 삼성화재는 국립특수교육원 등과 연계한 ‘장애-비장애 통합캠프’를 마련해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 해소 등에 나서고 있다. 삼성화재 신현근 홍보부장은 “장애인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과 진행도 기업의 중요한 사회공헌의 하나”라면서 “기업들의 활발한 참여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이코노믹리뷰 김재홍 기자 atom@<ⓒ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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