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에 중·저소득층 소비 위축
주가 상승 기반 고소득층 지출 견조
증시 거품 논란에 'K자형 경제'도 위태
미국에 와서 종종 달러숍을 이용한다. 아이들 학교 준비물을 급히 사야 할 때 편의점인 CVS에 들르면 공책 한 권, 카드 한 장에 5달러(약 7400원)를 훌쩍 넘기지만, 같은 물건을 '한국판 천원숍'인 달러숍에선 1.25달러(약 1850원)에 구매할 수 있어서다. 품질 차이가 크지 않다면 집에서 거리도 비슷하니 달러숍을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이런 소비 흐름이 미국 내 저소득층만의 얘기는 아니다. 최근 미국 달러숍의 소비자층 구성 변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달러트리는 올해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신규 고객이 300만가구였으며, 이 중 60%가 연 소득 10만달러(약 1억5000만원) 이상 가구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는 1분기(50%)보다 증가한 수치다. 2020년 이후 누적 물가상승률이 대략 25%에 달하고 관세 불확실성으로 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주저하는 상황에서, 중산층 일부가 소비 하향 이동에 나서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반면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프리미엄 소비는 견조하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카드 결제 데이터를 보면 11월 가구당 신용·직불카드 소비는 1년 전보다 1.3% 증가했다. 이 가운데 고소득층 가구의 지출 증가율은 2.6%로 평균의 두 배에 달했다. 중간 소득층은 1.4%, 저소득층은 0.6% 증가에 그쳤다. 미국 소비를 고소득층이 견인하고 있다는 의미다. 최근 1인당 200달러(약 30만원) 안팎의 뉴욕 크리스마스 공연 티켓이 빠르게 매진돼 원치 않는 날짜에 겨우 예매하고, 인기 레스토랑 예약에 몇 번이나 실패한 경험에 비춰보면 고소득층 소비 열기는 여전히 뜨거워 보인다.
최근 미국 소비가 예상보다 탄탄하게 유지되는 배경은 여기에 있다. 미국 경제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는 소비 증가세는 둔화하고 있지만, 아직 꺾이지는 않았다. 다만 모든 소득층에서 고르게 소비가 늘고 있는 건 아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달 공개한 경기 동향 보고서인 베이지북에서 "전반적인 소비 지출은 줄어든 반면, 고가품 중심의 소매 지출은 견조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 지역 연방준비은행(연은)은 "고소득층은 (소비에) 제약을 받지 않지만 중·저소득층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른바 'K자형' 소비 양극화다.
미국 경제 성장률은 높고 지표는 견조해 보이는데 유권자들의 불만이 커지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난달 뉴욕시장 선거에서 '어포더빌리티(affordability·감당할 수 있는 비용)'가 핵심 이슈로 떠오른 배경이다.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백인 서민 노동자를 핵심 지지층으로 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참모들이 연일 미국 경제가 강력하다고 홍보하고, 트럼프가 관세 수입을 활용한 1인당 2000달러(약 300만원) 배당금 구상을 꺼내 든 것도 성난 민심을 의식한 행보다.
더 큰 문제는 내년엔 거시경제 지표까지 악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소비를 떠받치는 고소득층의 지출은 주가 상승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S&P500 지수가 최근 몇 년간 큰 폭으로 오르며(2023년 24.2%·2024년 23.3%·2025년 현재 누적 16.1%) 자산 효과를 키웠지만, 기술주 과열과 버블 논란이 커질 경우 소비에 미칠 충격이 작지 않다. 미국 경제가 주식시장에 기대 달리고 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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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자형 경제' 개념을 대중화한 경제학자 피터 앳워터는 최근 미국 경제를 상단이 무거운 젠가 타워(top-heavy Jenga tower)에 비유했다. 겉보기엔 높이 쌓여 견고해 보이지만 아래 블록이 빠져나간 구조로,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내년 미국 경제의 관전 포인트는 이 젠가 타워를 위태롭게 떠받치는 고소득층 소비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느냐다. 주가 조정이나 고용 둔화가 이 층의 소비 심리를 흔드는 순간, 지금의 견조한 지표는 빠르게 민낯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뉴욕=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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