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정부 과제, 금융을 경제의 엔진으로
'성장의 마중물' 위한 금융정책 재설계해야
지난해 9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이례적인 보고서를 하나 발표했다. 제목은 '유럽 경쟁력의 미래(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전직 중앙은행 총재가 유럽의 산업 전략을 논했다는 점도 이례적이었지만,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금융에 관한 이야기였다. 드라기는 "유럽 금융 시스템은 더는 고성장 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 금융의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은행 중심 금융시장에서 자본시장 중심 구조로의 전환, 규제 유연화, 민간 투자 확대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유럽이 디지털 전환, 에너지 전환, 국방 산업 같은 전략적 분야에서 경쟁력을 회복하려면 금융이 다시 산업의 '엔진'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자각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이었다.
이 보고서는 지금의 한국에도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금융이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으로 기능을 하고 있는가. 6월이면 대한민국은 새로운 정부를 맞이한다. 정치의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정책적 기대와 요구는 뒤엉켜 쏟아지지만 단 하나 '경제를 다시 뛰게 할 동력'에 대한 요구만큼은 언제나 일관됐다. 그 중심에는 이제 '금융'이 있어야 한다. 리스크 통제를 넘어, 성장의 촉진자로서 금융을 재정의해야 할 때다.
한국의 금융정책은 지난 10여년간 위기 대응과 시장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점점 더 견고한 통제 체계를 구축해 왔다. 규제는 일관되고, 절차는 엄격했으며, 감독은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을까. 산업은 빠르게 재편되고 기술은 금융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데, 우리의 금융은 여전히 리스크 회피에 머물러 있다. 기업 대출은 억제됐고, 상품 혁신은 위축됐다. 금융은 더 이상 성장의 마중물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전환의 시점이다.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닌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규제'로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자본과 대출, 소비자 보호와 혁신, 통제와 자율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 차기 정부의 금융정책에 주어진 과제다. 금융이 다시 생산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현재의 자본비율 규제 구조는 기업 대출을 꺼리게 만들고 있다. 위험가중치를 현실화하고, 산업 성장을 뒷받침하는 대출 유인을 회복시켜야 한다. 자본 운용에 있어 금융사의 전략적 자율성도 회복돼야 한다. 금융이 시장과 동떨어진 관리 대상이 아닌, 스스로 역동성을 갖는 생태계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소비자 보호와 혁신 사이의 균형도 중요하다. 복잡한 금융상품에 대한 지나친 책임 전가는 혁신을 가로막고, 결과적으로 소비자 선택권을 축소시킨다. 규제는 보호가 아닌 위축의 수단이 돼선 안 된다. 디지털 금융 시대에 맞는 기능 기반 규제, 이른바 '동일 기능-동일 규제' 원칙도 절실하다.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와 전통 금융 간 형평성 있는 경쟁 환경을 만들어야 시장이 더 빨리 진화할 수 있다.
미래 금융을 위한 유연한 제도 설계도 시급하다. 신산업 진출과 인수합병(M&A)을 가로막는 제약을 걷어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금융산업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 산업의 성장 전략과 직결되는 문제다. 끝으로, 신뢰받는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개혁의 기반이 돼야 한다. 내부통제를 제재 중심이 아닌 예방 중심으로 재설계해 실효성을 높여 시장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차기 정부는 '규제를 없애는 개혁'이 아니라 금융이 다시 성장의 촉진자가 되는 '균형 잡힌 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변화된 경제·산업 환경 속에서 금융은 이제 국가 성장 전략의 핵심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금융이 바뀌어야 경제가 뛴다. 금융이 국가 경제를 움직이는 성장의 엔진이 될 수 있도록 금융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다.
이선애 경제금융부장 ls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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