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경제 변화 겪은 나라들, 세대·성별 갈등 경험
남성의 전통적 가치관과 여성의 현대적 가치관 대립
중간 수준의 출산율 국가들, 현대화에 오랜 시간 할애해 충돌 적어
"가정·사회에서 남녀 동등한 역할 수행해야 한다는 인식 변화 필요"
202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로디아 골딘 하버드대 교수가 한국의 초저출산 원인이 산업화 시기 급격한 경제 변화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한국, 일본 등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겪은 나라들은 전통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요구 간의 충돌을 경험하고 남녀가 출산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관을 보이면서 오늘날의 초저출산 현상이 발생했다는 분석이다.
골딘 교수는 지난달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워킹페이퍼 '아기들과 거시경제(Babies and Macroeconomy)'를 발표하고 오늘날 한국 등 초저출산 국가들이 왜 급격한 출산율 감소를 보였는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내놨다.
보고서는 출산율에 따라 국가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연구를 진행했다. 첫 번째 그룹은 1950년대 이후 중간 수준의 출산율로 시작해 여전히 중간 수준의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는 덴마크·프랑스·독일·스웨덴·영국·미국이다. 두 번째 그룹은 높은 출산율로 시작했지만 초저출산율을 보이게 된 그리스·이탈리아·일본·한국·포르투갈·스페인이다.
'급격한 경제 변화' 겪은 국가들이 초저출산 경험…전통적 가족관 지닌 채 도시로 대거 이주
연구 결과, 이들 그룹은 1960~1970년대 경제 성장에 있어 큰 차이를 보였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한 국가들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920년부터 2022년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반면 두 번째 그룹에 속한 국가들은 1920~1930년 침체를 겪고 1950~1960년까지 회복되지 않다가 196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이들 국가는 현대화의 물결에 빠르게 편입됐지만 시민들의 신념과 가치관, 전통은 더디게 변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두 번째 그룹의 국가들은 농촌 지역에서 도시로 대규모 인구 이동을 겪었다. 1960년 당시 첫 번째 그룹 국가들의 평균 농촌 비율은 29%, 두 번째 그룹 국가들의 평균 농촌 비율은 50%였는데 2023년에는 농촌 비율이 각각 16%, 21%로 감소했다. 이같은 농촌 비율의 감소는 2000년대 초반까지 포르투갈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발생했다.
골딘 교수는 이주가 출산율 변화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농촌 지역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전통적인 신념과 방식을 가진 채 도시에 이주하게 되고, 이주자의 자녀들 중 딸들은 현대화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얻는 반면 아들들은 상속이나 가족 사업 등 과거를 유지하는 데에서 더 많은 혜택을 얻는다. 따라서 급격히 현대화된 국가의 남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신념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한 국가의 남성들보다 가사 일과 돌봄 노동을 훨씬 적게 한다고 그는 분석했다.
실제로 2019년 기준 가사·돌봄 시간의 남녀 차이는 일본이 3.1시간, 이탈리아는 3시간이었지만 스웨덴과 덴마크는 각각 0.8시간, 0.9시간에 그쳤다. 당시 일본과 이탈리아의 합계출산율은 각각 1.36명, 1.27명이었고 스웨덴, 덴마크는 각각 1.7명을 기록했다. 가사와 돌봄 시간의 남녀 간 격차가 클수록 합계출산율은 감소했다.
男 전통적 가치관· 女 현대적 가치관 대립…출산에 대한 견해차로 이어져
골딘 교수는 두 번째 그룹 국가들 중 가장 극단적인 예로 한국을 제시했다. 1980년경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아이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의 부모는 격동의 1950년대 말에 태어나고, 그의 조부모는 193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다. 당시에는 경제가 급격히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와 조부모의 생활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소득이 급격히 상승하던 1960년대에 자라 결혼 당시 실제 소득이 네 배 증가하고, 농촌에서 서울로 대규모로 이주하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도시로 가져왔고 아들은 전통적인 한국 가정, 즉 남편이 지배적이고 아내는 가사와 자녀 양육을 담당하는 가부장제하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생 딸이 있었다면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가 결혼하는 2005년경, 1인당 소득은 태어났을 당시보다 4.5배 증가했고 25~35세 여성 중 대학 교육을 받은 비율은 1995년 24%에서 2005년 51%로 늘어났다. 25~29세 여성 고용률 또한 같은 기간 48%에서 68%로 증가했다. 아들은 여전히 부모의 전통을 많이 가진 반면 현대 사회에서 여성은 자율성이 커지면서 두 성별 간의 가치관이 충돌했고 이는 초저출산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 등 효도와 조상 숭배, 가족 혈통을 중시하는 국가들은 남성이 여성보다 과거에 더 집착하게 하고 여성들은 현대화를 통해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됐다고 분석했다.
골딘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이 남녀 간 출산에 대한 생각 차이로 이어졌다고 봤다. 급격한 경제적·사회적 변화의 시기에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많은 자녀를 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성들은 자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이 더 많은 자녀를 원할 경우 본인의 경력을 희생하거나 낮은 수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취약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골딘 교수는 보고서 말미에서 "급격한 경제 변화는 과거부터 강하게 고수된 신념에 도전하게 되는데, 신념은 기술이나 경제 변화보다 더 천천히 변화한다"며 "이로 인해 급격한 경제변화는 세대와 성별 간 갈등을 일으키고 출산율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녀가 가정과 사회에서 동등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버지와 남편들이 (가사와 양육을 위한) 시간을 제공하고 자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신뢰가 있다면 성별 간 출산 욕구의 차이는 사라질 수 있다"며 "남성들이 가정에 대해 재정적·시간적·정신적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회적 비난이 존재하는 국가나 주에서 살게 된다면 신뢰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북유럽 국가들에서 여성의 고용률이 높고 출산율 또한 높은 것은 그러한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박재현 기자 no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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