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자세를 중시한다. 심지어 패배를 인정할 때도 몸과 마음을 정돈하는 게 중요하다. 이는 상대를 존중하는 행동이자 자기 품격을 높이는 실천이다. 바둑이라고 패배의 쓰라림이 덜하겠는가. 하지만 패배 앞에서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한다면 상대는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승리에 취해 잠시나마 우쭐함에 취했던 자기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지기에….
바둑 철학에는 상생의 교훈이 녹아 있다. 바둑에서 그 의미를 깨닫는 자라면 품격 있는 인생을 향한 담대한 여정에 합류할 자격이 있다. 세속에 찌들어 자기 영혼을 파괴하는 쳇바퀴 같은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한 항로에 들어서기 위한 출발점인 바둑의 마무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바둑에서는 계가(計家) 이전에도 승패가 갈린다. 이른바 돌을 던지는 행위로 패배를 시인한다. 바둑판 위에 사석(死石)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뒤 상대를 향해 가벼운 묵례(默禮)를 곁들이는 행동으로 족하다. 패배의 시인은 쓰라린 결정이지만, 프로 기사 중에서 한 번도 돌을 던져보지 않은 이는 없다.
문제는 돌을 던지는 타이밍을 잡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둑 실력이 뛰어난 세계 정상급 기사도 돌을 던질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해 품위를 훼손할 때가 있다. 너무 빨리 돌을 던지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자칫하면 무책임하고 경솔한 태도로 비칠 수 있다. 그런 게 무섭다고 너무 늦게 돌을 던지는 것도 예의와 거리가 있다. 승패가 이미 갈린 지 한참 지났고, 별다른 반전 요소가 없는 게 명확한데도 돌을 던지지 않는 것은 협량(狹量)을 자인하는 꼴이다. 아쉬움이 조금 남아 있을 때 과감하게 돌을 던질 줄 아는 것도 용기다.
‘반상의 미학자’로 불리던 일본 바둑의 오타케 히데오 9단은 한 타임 빠르게 돌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한 기사였다. 상대 실수를 기다리며 구차하게 승리를 구하는 행동은 올바른 바둑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그의 소신이 녹아 있다. 당장의 패배가 쓰리고, 아프더라도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일 줄 아는 이는 성장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선택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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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도 돌을 던질 타이밍을 구해야 할 때가 있다. 그 적절한 때가 언제인지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인생이 제대로 된 항로로 가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이는 자기 자신이다. 눈앞의 욕심에, 그 욕망 때문에 돌을 던져야 할 타이밍을 미루고 있을 뿐이다. 미룸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라해지는 건 거울 앞에 섰을 때 보이는 바로 그이 아니겠는가.
류정민 사회부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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