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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완전정복]②인류를 석유에서 구한 세명의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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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디너프 교수,1966년 포드 전기차에 자극
휘팅엄 교수 연구 이어받아 새 양극물질 개발
석유값 떨어지자 서방에선 배터리 연구 시들
日 요시노 박사, 탄소 소재 음극재 발견

편집자주지금은 배터리 시대입니다. 휴대폰·노트북·전기자동차 등 거의 모든 곳에 배터리가 있습니다. [배터리 완전정복]은 배터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일반 독자, 학생, 배터리 산업과 관련 기업에 관심을 가진 투자자들에게 배터리의 기본과 생태계, 기업정보, 산업 흐름과 전망을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만든 코너입니다. 매주 토
요일에 보도합니다. 연재 후에는 책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배터리완전정복]②인류를 석유에서 구한 세명의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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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테슬라보다 빨랐다

지금 전기차 시대를 이끄는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테슬라를 설립한 일론 머스크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전기차의 역사는 100년도 훨씬 더 됐다. 과거의 선구자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머스크도, 테슬라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일찌감치 배터리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전기차 개발에 몰두했다. 특히 1859년 프랑스 사람 가스통 플랑테가 납축전지를 개발한 이후 배터리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많은 시도가 이어졌다. 그중 1888년 독일 발명가 안드레아스 플로켄이 제작한 '일렉트로바겐'을 최초의 전기자동차로 보는 의견이 많다.


[배터리완전정복]②인류를 석유에서 구한 세명의 과학자 플로켄이 1888년 제작한 전기자동차(2011년 재현품). 출처:위키피디아

칼 벤츠가 처음 가솔린을 이용한 내연 기관차를 발명한 게 1885년이니 불과 3년 차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전기차가 우세했다. 시동을 걸기도 쉽고, 매연과 소음, 진동도 없었기 때문이다. 1912년 미국에 등록된 전기차는 3만3842대에 달했다.


하지만 헨리 포드가 1908년 컨베이어시스템을 이용해 값싼 가솔린차를 쏟아내자 전기차는 완전 자취를 감추었다. 초기 흥행에도 전기차는 한번 충전에 50~60마일(80~96㎞)밖에 이동하지 못해 자주 충전해야 한다는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 포드자동차가 1966년 돌연 전기차 출시 계획을 발표했다. 전기차를 시장에서 몰아낸 자동차 회사가 다시 전기차를 내놓겠다고 하니 세간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포드는 전극으로 나트륨과 황을 사용하는 새로운 유형의 배터리를 고안해내기도 했다. 이 새로운 나트륨황(NaS) 배터리는 기존 납축전지보다 15배나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었다.


포드는 이 배터리를 이용한 전기차가 한번 충전하면 200km를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 배터리가 섭씨 300도에서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고온 폭발 위험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배터리완전정복]②인류를 석유에서 구한 세명의 과학자

포드가 전기차 출시 계획을 밝힌 것은 1960년대 들어 공해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됐기 때문이었다. 석유, 석탄 등 화석 연료 덕분에 급속도로 산업화가 이뤄졌으나 매연으로 인한 환경 오염의 부작용도 함께 나타났다. 가솔린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포드도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정적이면서도 성능이 높은 전기차용 배터리를 개발하는 것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었다"

포드의 나트륨황 배터리는 결국 상용화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포드의 제안은 여러 과학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중 한명이 2019년 리튬이온배터리 개발에 대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존 구디너프 교수였다.


구디너프 교수는 '더 파워 하우스(The Power House)'를 쓴 스티브 레빈(Steve Levine) 쿼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것이 갑자기 바뀌었다. 배터리는 더이상 따분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신이 배터리 연구로 전환한 배경 중 하나로 포드 자동차의 연구 결과를 꼽았다. 1973년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던 석유 파동과 향후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스탠리 휘팅엄 박사의 인터칼레이션 연구 결과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배터리완전정복]②인류를 석유에서 구한 세명의 과학자 2019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사진출처=노벨위원회]

구디너프 교수는 1922년 독일 예나에서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이다. 올해 6월 100세로 별세했다. 노벨 화학상을 받았을 때 그는 97세였다.


구디너프 교수는 예일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시카고대학교에서 물리학으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았다. 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기상학자로 미군에 복무하기도 했다. 이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과 옥스퍼드대학을 거쳐 1986년부터 텍사스대학교로 옮겨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첨단 과학 연구에 매진했다. MIT 링컨연구소에 제작할 때는 컴퓨터에 쓰이는 램(RAM) 개발에 기여하기도 했다. 구디너프 교수는 어렸을 때 난독증을 앓았는데 그게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라고 한다.


그는 1970년 석유 위기가 터지면서 대체 에너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데다 언제 고갈될지도 모르는 석유를 대신할 새로운 에너지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 공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MIT 링컨 연구소는 그의 연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무기화학 교수직을 제안했다. 그는 숙원을 풀 기회라 생각하고 곧바로 영국으로 떠났다.


[배터리완전정복]②인류를 석유에서 구한 세명의 과학자

구디너프 교수는 자신보다 젊은 과학자였던 휘팅엄 박사의 연구 결과에 주목했다. 엑슨 모빌 연구원이었던 휘팅엄 박사는 인터칼레이션의 원리를 이용한 리튬이온배터리를 개발했으나 이를 상용화는 데는 애를 먹고 있었다.


휘팅엄 박사의 리튬이온배터리는 지금 우리가 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양극에는 이황화티타늄, 음극에 리튬금속을 각각 적용한 배터리를 내놓았다. 지금 우리가 매일 접하는 리튬이온배터리는 양극에 리튬화합물, 음극에는 흑연 등 탄소화합물을 사용한다.



[배터리완전정복]②인류를 석유에서 구한 세명의 과학자

리튬 금속을 음극에 사용할 경우 충전 시 음극으로 이동한 리튬이온이 전자와 결합할 때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나뭇가지처럼 뾰족하게 자라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것을 덴드라이트(Dendrite)라고 부른다. 이 날카로운 리튬이 분리막을 뚫을 정도로 자라면 음극과 양극이 만나 단락(short, 쇼트)이 발생해 폭발로 이어진다. 당시 휘팅엄 박사의 실험실에선 여러 차례 폭발이 일어나 소방관들이 자주 출동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휘팅엄 교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리튬금속에 알루미늄을 추가하고 전해질을 바꾸는 등 실험을 계속했다. 1976년에는 스위스 시계 업자들을 위해 태양열 시계에서 작동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리튬이온배터리를 발표하기도 했다.


[배터리완전정복]②인류를 석유에서 구한 세명의 과학자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유가가 안정되면서 엑슨모빌의 관심도 점점 식기 시작했고 휘팅엄 교수에 대한 지원도 끊겼다.


휘팅엄 교수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구디너프 교수다. 구디너프 교수는 양극에 리튬코발트산화물을 적용할 경우 훨씬 더 높은 전압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배터리는 약 4볼트의 전압을 기록했는데 이는 휘팅엄 교수의 것보다 약 2배 정도 높았다. 그는 1980년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힘을 내는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 이 새로운 양극 물질을 발견했다고 학계에 보고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1980년대 들어 기름값이 낮아지면서 대체 에너지에 대한 관심도 급격히 떨어졌다. 구디너프 교수의 발견도 당시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다.


전자 왕국 日에서 완성된 이차전지

서방에서 대체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시들하던 그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일본 기업의 실험실에선 한명의 젊은 과학자가 시대의 흐름을 바꿀 새로운 물질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1948년 일본 스이타에서 태어난 요시노 아키라 박사는 교토대학에서 석유화학을 전공(석사)한 뒤 1972년 아시히카세이에 입사했다. 그는 곧바로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에 있는 한 연구소에 배속됐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 위한 '씨드(seed, 씨앗)' 기술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시장의 니즈에 맞으면서도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물질을 발견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낙담하던 그가 리튬이온배터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사히카세이에 입사한 지 10년째인 1981년.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요시노 박사는 처음에 전도성 고분자(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인 폴리아세틸렌을 음극에 적용해 이차 전지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폴리아세틸렌은 전기화학적으로 이온과 전자의 출입이 가능하다. 이런 성질을 이용하면 2차전지의 음극재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에 맞는 적당한 양극 재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1982년 어느 날 연구실에서 여러 문헌을 뒤적이던 중 우연히 구디너프 교수의 논문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구디너프 교수가 발견한 리튬코발트산화물을 양극재로 쓰고 폴리아세틸렌을 음극재로 사용하는 2차전지라는 새로운 개념을 생각해냈다. 이듬해 그는 곧바로 이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고 후속 연구를 이어갔다.


[배터리완전정복]②인류를 석유에서 구한 세명의 과학자

하지만 실제 제품으로 구현하면서 또 다른 한계에 봉착했다. 폴리아세틸렌을 음극으로 사용하니 부피가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이를 대체할 여러 물질을 찾던 중 그는 VGCF(Vapor Phase Grown Carbon Fiber)라는 특수 탄소 섬유를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VGCF의 생산량이 극히 적다는 것이었다. 대중성 있는 2차 전지를 만들기 위해선 값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새로운 음극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석유 코크스(Cokes)였다. 이로써 양극에 리튬코발트산화물, 양극에 석유 코크스를 적용한 리튬이온배터리가 탄생하게 된다. 1985년의 일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리튬이온배터리의 기본 구조가 된다.


요시노 박사의 리튬이온배터리에는 '리튬 이온'만 있을 뿐 순수 리튬금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음극 재료인 코크스는 안정적으로 리튬 이온을 주고받아 기존에 리튬을 이용한 배터리에 비해 안정성이 뛰어났다. 1990년대 일본 기업들이 전자 제품에 리튬이온전지를 적용하면서 본격적으로 2차전지 시대가 열렸다.



이처럼 현재 널리 쓰이는 리튬이온배터리의 원형은 일본 기업에서 탄생했다. 전자 산업이 융성했던 일본에서 리튬이온전지가 태동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후 리튬이온배터리는 정보기술(IT) 산업과 함께 성장을 거듭했다.

<참고문헌>
-스티브 레빈, '더 파워하우스(The Powerhouse)'
-요시노 아키라, '노벨화학상 요시노 박사의 리튬이온전지 발명 이야기'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정경윤·이상민·이영기·정훈기, '이차전지 승자의 조건'



강희종 기자 mindl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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