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프린트샵에는 수험생 각오 빼곡히
거리 즐비한 담배꽁초들…"눈 내린 것 같아"
[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 지난달 29일 오전 6시 30분, 서울 고시촌의 상징인 노량진. 매일 새벽 첫차를 타고 그곳에 모여드는 이들은 예비 직장인들이다. 인터넷 강의가 보편화하면서 노량진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과거처럼 새벽부터 공무원 학원 줄을 서고자 학생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더는 볼 수 없다.
자습이나 스터디 모임 등을 위해 일찍 집을 나선 학생 1~2명씩이 학원 쪽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노량진 거리에 문을 연 가게는 '24시간 영업'을 내건 가게뿐이었다.
과거 수강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노량진은 최근 들어 유동 인구가 많이 줄었다. '9급 공시생' 경쟁률도 3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철밥통'으로 한때 인기를 얻었던 것은 옛말, 최저임금보다 낮은 공무원 보수에 청년들이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코로나19와 인터넷 강의 등의 확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년간 노량진 역 앞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김밥을 팔아온 윤정숙씨(63·가명)는 "코로나 사태 이후로 사람이 많이 줄었다"며 "그 전부터 인터넷 강의 등으로 학생들이 빠져나가면서 많이 줄었지만, 코로나 사태가 결정타였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가 판매하는 김밥은 종류를 가릴 것 없이 한 줄에 2500원이었다. 그에게 질문하고 있는 사이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와 김밥을 봉지에 담아갔다. 손님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공시생들이 대부분이다.
오전 7시가 되자 저가 커피집들 몇 곳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노량진의 대명사로 알려진 '컵밥 거리' 매장들은 한 곳도 문을 열지 않은 상황. 이곳은 오전 10시쯤은 돼야 문을 연다. 컵밥 거리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공시생들이 없다는 뜻이다.
한때 노량진 중심가에 있던 컵밥 점포들은 2015년 거리 미화 등을 이유로 학원가에서 떨어진 노량진 만양로 입구~사육신 공원 앞 육교 거리로 밀려났다. 1분 1초가 아까운 공시생들이 아침 식사를 위해 굳이 멀리 떨어진 컵밥 점포를 찾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대신 학생들의 발걸음은 저가 커피 집으로 몰렸다. 불을 밝히고 문을 연 매장마다 한두 명씩의 학생들이 커피를 주문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개인 매장들은 브랜드 저가 커피들보다 더 저렴한 가격과 할인 정책 등을 내세워 학생들의 가벼운 주머니를 저격했다. 한 매장은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 1000원'을 내걸었고, 또 다른 매장은 25잔을 미리 결제할 경우 6잔을 공짜로 준다는 내용의 입간판을 세우고 있었다.
한 저가 커피 매장에 들어서자, 벽을 가득 메운 커피 쿠폰들이 눈에 띄었다. 매일 커피를 사러 오는 공시생들의 커피 쿠폰이었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카페 라테를 주문할 법도 한데 매장에 뒤따라 들어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메리카노)' 족이 많은 MZ세대의 특성 때문일까. 20대가 대부분인 노량진 공시생들의 청춘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카페 알바생도 "'아아' 주문이 많다"고 말했다.
공시생 경쟁률이 줄었다지만, 여전히 인기 있는 직렬의 경쟁률은 100대 1을 넘어선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사람 100명 중 98~99명은 탈락자가 된다는 뜻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청춘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는 곳곳에 널린 담배꽁초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서울 시내 담배꽁초 없는 골목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특히 노량진에는 많아 보였다. 녹지도 않아 검게 변색한 눈 더미 위에 점점이 박혀 있는 담배꽁초들이 거리의 미관을 해치고 있었다.
노량진 중심가의 한 건물 청소 용역을 맡은 이화선씨(70·가명)는 새벽부터 빗자루로 건물 앞 쓰레기들을 쓸어내고 있었다. 이씨는 "아무리 힘들다 해도 청년들이 이래서야 쓰나"라며 "일요일에 쉬고 오면, 월요일에는 더 심하다. 눈이 내린 것처럼 담배꽁초들이 즐비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유동 인구가 줄면서 학원 전단을 나눠주는 아르바이트생도 줄었다. 수년간 이 일을 해 왔다는 60대 A씨는 "학원들도 더 이상 여러 명의 아르바이트생을 챙겨줄 여력이 안 된다"며 "강사들이 인기 있다 싶으면 자기 사업을 차려 나가다 보니, 학원들도 예전만 못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예전보다 더 썰렁해진 노량진 학원가지만 합격을 꿈꾸는 청춘들의 마음만은 진실하고, 간절하다. '24시간 영업'을 내건 한 프린트 점 벽에는 공시생들의 바람을 적은 색색의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있다.
'내년엔 각오해라, 진짜다'라는 장수생의 바람, '내가 경찰 안 되면 누가 돼'냐는 경찰직 공무원 희망자의 바람, '우리 진영이 할 수 있어'라는 공시생 가족들의 바람까지 한 곳에 모였다. 경찰직 공무원을 꿈꾼다는 임현아(24·가명)씨는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주변에서 경쟁률이 세져서 힘들 거라고 해도 일단은 해 봐야죠"라고 말했다.
오전 8시가 되자, 노량진 학원가는 환해졌다. 종종걸음으로 거리로 나온 학생들은 곳곳의 학원 입구를 찾아 들어갔고 일부 학생은 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A씨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행인들과 학생들을 향해 열심히 전단을 내밀고 있었다. "추워도 더워도 일은 해야죠". 누구도 흔쾌히 전단지를 받아들지 않았지만, A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100대 1의 경쟁률에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노량진 공시생들을 닮아 있었다.
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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