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명진규 기자] 1851년 여름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 세계 최초의 만국 박람회가 열렸다. 산업혁명으로 승기를 잡은 영국은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을 소개하기 위해 ‘수정궁’을 지었다. 건축가이자 정원 설계사였던 조지프 팩스턴이 하이드파크 내에 지은 수정궁은 철골과 유리로 만든 거대한 유리 온실이었다.
성 바오로 대성당보다 바닥 면적이 6배 넓고 길이만 563m에 달했다. 박람회가 열리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길이를 1851피트에 맞췄다. 이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총 공사기간은 7개월에 불과했다. 공장에서 생산한 모듈을 현장에서 조립해 만드는 새로운 공법이 사용됐다.
수정궁에는 1만5000여 개인과 단체가 내놓은 10만점에 달하는 상품들이 전시됐다. 시간당 5000부의 신문을 찍어내는 인쇄기, 현대 자전거의 전신인 벨로시페드도 소개됐다. 프로이센의 무기, 미국의 농기구, 오스트리아 가구, 프랑스의 패션 상품과 스위스 시계 등이 소개됐다. 세계 최초의 만국 박람회는 인류 역사를 ‘혁명’에서 ‘산업화’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수많은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소설가 샬럿 브론테는 부친에게 쓴 편지에서 "만국 박람회는 놀라운 곳"이라며 "인간들이 산업을 통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거기 다 있어요"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지하에서 쓴 수기’에 수정궁을 기술이 권력을 넘어 종교가 되는 미래사회의 축소판으로 묘사해 디스토피아의 상징으로 삼았다.
박람회가 끝난 뒤 수정궁은 해체되었다가 1854년 다시 조립되어 세워졌다. 이후 수정궁은 1936년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현재 백화점을 비롯한 초대형 쇼핑센터의 원형이 됐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설혜심 교수는 저서 ‘소비의 역사’를 통해 당시 수정궁이 새로운 계층인 ‘소비자’를 탄생시켰다고 평가했다. 산업화로 인한 계급화가 본격화된 상황에서 수정궁을 통해 소개된 수많은 제품들이 소비자를 매료했고 소비의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설명이다.
돈을 버는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돈을 소비하는 순간은 같다. 과거 왕족들만 가질 수 있었던 럭셔리 제품들도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소비되기 시작하며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됐다.
170년이 지난 현재 유통업체들은 다시 수정궁을 짓고 있다. 과거와 달리 상품을 빽빽하기 진열하는 대신 경험을 채운다. 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는 총 4억여종의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상품이 곧 경험이 되는 시대는 온라인 쇼핑 시대가 열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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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도전자였던 온라인 쇼핑몰들이 유통업계의 주역으로 떠오르며 백화점을 비롯한 대형 쇼핑센터들은 상품보다 경험에 주목하고 있다. 사지 않고 체험하고, 목적 없이 산책하거나 즐기는 곳으로 만드는 이유다. 오프라인 쇼핑센터의 강점을 살렸다지만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전달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과거의 수정궁이 소비라는 경험을 만들어냈다면 지금은 어떤 경험을 만들어내야 할까. 유통업계의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명진규 기자 ae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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