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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에스팔리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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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에스팔리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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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난 건 버스 안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강변마을 생콤돌트에서 로(Lot) 강을 따라 에스팔리옹에 도착한 오후 5시쯤. 르퓌길을 따라 걷는 여정 중이었지요. 관광안내소를 찾아 지도를 얻은 후 에스탱 가는 버스를 탈 양으로 정류장 위치를 물었습니다. 안내인이 친절하게 알려준 장소에 가니 뭔가 이상합니다. 버스가 설 곳 같지 않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변의 남자에게 또 묻습니다.


'여기서 에스탱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느냐? 잘 모르겠다. 그러면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 보겠다. 나는 학교버스 기사인데 너를 에스탱까지 데려다 줄 수 있다. 내 버스를 타겠느냐? 좋다. 그러면 학생들이 나올 때까지 15분만 기다려라. 고맙다.'

오후의 금빛 햇살에서는 상쾌한 징소리가 납니다. 포플러나무 잎사귀들이 은빛 물고기들처럼 몸을 뒤챕니다. 허공에서 사스락 반짝반짝 제 몸을 연주합니다. 로 강물의 물살은 아주 셉니다. 에스팔리옹에 카누나 카약들이 많은 이유죠. 여름철이면 세계 각지에서 휴양객이 몰려올 겁니다. 김소월 시 '가는 길'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릅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저 강물이 딱 그렇습니다. 맑고 깊고 웅장하고 빠릅니다.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를 실감합니다. 소월이 살았던 북쪽의 청천강은 이럴까요? 서산의 해는 지고 길은 떠나야 하는데 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 자꾸만 머뭇거립니다.


이럴 때는 강물이 선생님이죠. 아침과 저녁을, 상류와 하류를 하나로 이어줍니다. 앞에 가는 물이 뒤에 오는 물의 손을 잡아줍니다. 머뭇거리거나 끊어지는 법이 없지요. 시간과 공간과 움직이는 모든 삶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공자는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 도의 본성이 '쉼 없는 전진'에 있음을 말했으며, 정자(程子)는 거기에 주를 달아 군자는 이러한 도를 본받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쉬지 않는다[自强不息]'고 했나 봅니다. 자강불식의 냇물. 자강불식의 사람.

강물은 흘러야 강물입니다. 그런 것처럼, 강 따라 길 걸으며 사람을 생각합니다. 걸어야 사람이다! 처음으로 걷기 시작한 선조. 처음으로 척추를 세운 호모 에렉투스. 먼 진화의 시원에서 흘러온 유전의 강물이 제 몸 또한 흘러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긴 다리, 부드러운 관절, 강인한 아킬레스건과 넓어진 발바닥…. 걷는다는 건 유전자의 약속이요, 부지런한 자강불식의 계약 아니겠는지요. '걸어야 사람이다!'는 결국 '부지런해야 사람이다!'로 바뀝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3]에스팔리옹에서

잠시 뒤 소년소녀들이 버스 안으로 우당탕탕 올라옵니다. 활달하고 잘 까불고 두 눈엔 호기심과 씩씩함을 꼭 같은 분량으로 나누어가진 소년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안녕, 난 한국에서 왔다. 저도 한국 알아요. 북인가요 남인가요? 남이야. 이름이 뭐니? 에딴. 난 윤. 이 사람은 리. 넌 몇 살? 열두 살. 반갑구나. 내 아들은 서른 살이다. 우와!'


내가 에스탱 간다고 하자 자기 집이 거기라며 같이 가면 된다고 합니다. 버스가 출발하더니 잠시 뒤 더 큰 운동장에 섭니다. 에스팔리옹에서 주변 지역으로 가는 스쿨버스 정류소. 이 버스 저 버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이 햇살 속 석류 알처럼 재잘거립니다. 에스탱 가는 버스를 여기서 바꿔 타야 합니다. 에딴이 풀밭에 들어가 뭔가를 가지고 나옵니다. 아내는 감격합니다. 그가 노란 민들레꽃 두 송이를 꺾어다 그녀에게 건네준 겁니다.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신라 향가인 '헌화가'. 정체 모를 8세기의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그 노래가 프랑스 소년의 입에서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꽃 바치는 마음,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군요.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에딴,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여기 다시 올게. 너를 다시 만나고 싶어. 그때는 너를 꼭 찾을게. 저도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이담에 크면 한국에 가고 싶어요.'


에스탱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무언가 열심히 그리기 시작합니다. 받고 보니 눈물이 핑 돕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이런 디자인을 생각해냈을까요. 에딴은 종이 위에 붉은 색의 큰 하트를 삐뚜름하게 그리고 그 안에 이름들을 써 넣습니다. ETHAN YUN LEE. 위에서 아래로 배열했네요. 우리 세 사람은 사랑으로 하나 되었어요.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요? 아내도 감탄합니다. '그래 에딴. 우리는 이제 네 사랑의 마음 안에서 하나 된 가족이구나. 너는 내 열두 살 새 아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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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 가장 빨리 친해진 사람. 어쩌면 위장한 천사인지도 모르는 열두 살 소년. 그에게 배운 작별 인사를 합니다. 하이파이브 하고 주먹 치고 악수하는 프랑스 소년들의 인사법. 숨 돌아가 흙이 되고 비가 되고 강물이 된 세세생생 모든 생명들과도 이런 사랑의 우애가 함께 하기를 서원합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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