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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우편함엔 편지가 없다/김기화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8초

'알이 부화하고 있어요,
우편물이나 이물질을 넣지 마세요! 주인백'


언제부턴가 편지가 부재하는 그들의 방
새집 모양의 빨간 우편함엔
새 식구들이 허락도 없이 세를 들었다
뾰족한 주둥이들을 쪽쪽대며
어미를 기다리고 있는 저들의 둥지


쥔장 행세를 하려고 들여다보다가
세 든 사람이 되어 숨죽이는 발길



■이쁜 시다. 난 이쁜 시가 좋다. 이쁜 시를 읽으면 나도 이뻐지는 것만 같아서 그렇다. 그런데 이쁜 시는 생각보다 드물다. 쓰기도 어렵다. 왜 그런지에 대해 오랫동안 수십 번 생각하고 생각해 봤는데 그때마다 알 듯 말 듯 모르겠다. 여하튼 써 보면 안다. 이쁜 시를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이다. 물론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쁜 시'란 그저 이쁜 말로 치장하거나 이쁘장한 척 꾸민 시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 시를 보라. 특히 저 세 번째 연의 산뜻한 역전을. 덧붙이자면 이러한 역전은 비단 자연과 인간 간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세계의 본질적이며 저속하기 짝이 없는 어떤 행태("쥔장 행세"/"세 든 사람")를 겨냥한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일단은 '이쁜 시'로 기억하고 싶다. 사뭇 잔인하기만 한 세상에 이처럼 이쁜 시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놀랍고 소중한 일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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