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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노란빛 잃은 계란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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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연 감독 '살인자의 기억법'

[이종길의 영화읽기]노란빛 잃은 계란 프라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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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내 손은 습관처럼 기억한다. 살인을." 깡마른 노구(老軀)지만 퍼렇게 날이 선 칼이다. 흐릿했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와 서늘한 기운을 뿜어낸다. 오래 전 살인을 그만뒀지만 여전한 맹수의 눈빛. 주위의 대나무는 그가 묻은 시신을 양분 삼아 꾸정꾸정하게 자랐다. 차디찬 한기가 그 틈새로 빠져나가 어지러이 흩날리자, 남자의 왼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가까운 기억부터 희미한 반딧불처럼 깜빡인다. 그러다가 불이 꺼지고, 그림자마저 쪼그라들어 어둠 속에서 소멸한다. 녹음기에 담긴 껄껄한 목소리만이 야성을 기억한다. "김병수. 넌 살인자다. 넌 치매환자다."

원신연 감독(48)의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고독한 노인 김병수, 실은 꾸준히 살인을 해오다가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다. 새롭게 등장한 연쇄살인범 박주태로부터 자신의 딸 은희를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한다. 권희철 문학평론가는 이 책의 해설에서 "피와 폭력을 위해 바쳐진 소설처럼 보이지만, 그런 부분들은 오로지 마지막 부분의 대혼란을 위해 쌓아 올린 반전 장치일 뿐"이라고 했다.


[이종길의 영화읽기]노란빛 잃은 계란 프라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 컷

영화는 난질난질한 노른자를 덜고 흰자의 부피를 늘렸다. 김병수는 살인에서 쾌감을 갈구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사회의 불순분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만 죽인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75)의 '택시 드라이버(1976년)' 속 트래비스 버클(로버트 드 니로)과 일정 부분 흡사하다. 트래비스는 열두 살 먹은 창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그녀의 포주인 스포트(하비 카이틀) 등 세 명을 살해한다. 김병수는 은희(설현)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살인을 시도한다. 부정(父情)이 피폐해진 삶의 유일한 동력이다.


원 감독은 소설에서 희미한 존재인 박주태를 민태주(김남길)로 이름을 바꾸고 폭넓게 조명한다. 팽팽한 대립에서 비롯된 긴장을 통해 활기찬 클라이맥스를 빚어내면서 부정을 부각한다. 반면 소설이 공을 들여 묘사하는 김병수의 혼란은 설경구(50)의 연기에 전적으로 기댄다. 퍽퍽한 얼굴과 꺼칠꺼칠한 목소리는 차디찬 한기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들쭉날쭉한 감정이 가지런히 정리되지 못해 적잖은 장면에서 과잉으로 나타난다. 장르적 재미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내면적 갈등의 깊이도 얕아진다.


[이종길의 영화읽기]노란빛 잃은 계란 프라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 컷


대대적으로 활용한 김병수의 내레이션에 경계가 모호해져버린 탓이 크다. 화면 밖에서 구사되는 해설이 특정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시간의 간격이 생긴 동안 설명되지 않은 사건을 말하기도 하고, 망령된 생각을 풀어놓기도 한다. 자신의 즉각적인 반응을 설명하기까지 해 배역의 상황과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는데 있어 한계를 드러낸다. 원 감독은 "일기 낭독이라는 틀을 빌리고 소설보다 호흡을 느리게 가져가면서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려고 했다"고 했다.


영화에 소설의 틀을 그대로 가져올 필요는 없다.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혼란을 다루는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47)의 '메멘토(2000년)'는 복합적인 플롯으로 이런 난관을 기똥차게 돌파했다.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레너드 쉘비(가이 피어스)의 현재와 과거(망상)를 각각 컬러와 과거로 구현해 교차시킨다. 여기에 현재를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해 관객을 쉘비와 유사한 처지에 놓이게 한다. 인물 심리에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줄여 쉘비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면밀히 관찰하게 한다. 관객을 두 번씩 극장으로 부른 힘은 독창적인 플롯과 영양이 풍부한 노른자에 있었던 셈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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