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 실종으로 독립유공자 추서 안 돼
고흥출신으로 해방전 대구형무소서 1년간 옥고
[아시아경제 최경필 기자]
일제에 맞서 학생신분으로 무장투쟁을 꿈꾸던 한 청년이 있었다. 일제의 강압적인 학생군사훈련도 조국 독립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아나키스트 신균우(申均雨)가 그다.
미군정의 일방적인 국립대 통합정책에 온 몸으로 맞섰다가 제적당했던 정의로운 청년은 결혼 일주일 만에 6·25전쟁으로 실종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참배실에도, 모교인 광주일고 독립운동기념관에도 그의 이름과 사진이 걸려 있지만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아직도 이렇게 많은 무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우리의 무관심 속에 묻혀 있다.
▲‘무등회 사건’ 주역으로 활약
신균우는 1926년 2월 24일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에서 보통학교 교사였던 신승휴와 김신방 사이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포두보통학교(현 포두초등학교)를 거쳐 1946년 광주고보의 후신인 광주서중학교(6년제)를 졸업했다.
서울대에서 제작으로 동국대에 입학했다가 6·25전쟁으로 실종됐다. 일제강점기 고흥에서 광주서중, 서울대를 진학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대단한 엘리트 코스였다.
그의 천재적인 실력은 동갑이자, 같은 집안인 신형식 전 건설부장관도 인정할 정도였다. 특히 광주학생운동을 이끌었던 그의 연설은 대중을 압도했다. 해방이후 서민호 의원의 선거유세에서 연설자로 나설 정도였다.
그는 광주서중에서 비밀결사단체인 무등회 결성에 참여했고, 1943년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전국으로 확대된 학생시위는 당시 일제의 압박에 숨죽이던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지를 일깨우는 큰 계기가 됐다.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194개 학교, 5만4000여명의 학생이 참여한 것으로 보고됐다.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 재학생의 60%가 시위운동에 참여했고, 1600여명이 구속됐다. 또 580여명이 퇴학, 2330여명이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받았다.
1차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은 일제의 탄압에도 꺼지지 않았다. 1940년대에 들어와 광주고보의 후신인 광주서중 후배들은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직접 항일민족투쟁에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인 ‘무등회 사건’이다.
1942년 5월 무등회에 가입한 신균우는 선배들이 구속된 후에도 기영도, 배종국, 박화진 등과 함께 조직을 재건해 활약했다.
특히 그는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까지 구상했다. 후배들에게도 군사교육이 다가올 독립을 위해 필요하고, 일제의 군사교육을 이용해 무력항쟁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했다.
또 신삼용, 조병대와 함께 심리전도 적극 구사했는데 천황부부 사진액자에 지렁이를 넣거나, 일본인 교관 책상에 오물봉투를 몰래 넣어서 골탕을 먹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부 하급생들의 친일적인 분위기가 돌자, 무등회의 중심회원들은 1943년 4월 본격적인 교풍쇄신운동을 벌였다. 교실을 순회하며 항일운동의 필요성과 조선어 사용을 강조했다.
하지만 하급생의 밀고로 교장에게 체벌을 당했고 일경은 주모자 검거에 나섰다. 이에 동맹휴학으로 맞서면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그 해 8월까지 350여명이 체포됐고, 1944년 2월까지 30여명이 구속됐다. 주동자였던 신균우는 단기2년, 장기4년의 징역형을 받고 대구청소년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다가 45년 8월 15일 석방됐다.
▲‘국대안 반대’로 제적…6·25때 24세로 실종
그는 1946년 서울대에 진학했으나 미군정청은 경성대학과 경성의전, 수원농업학교 등을 통합하는 국립대학통합안을 발표하며, ‘군정령’을 발동해 국립 서울대학교의 신설을 강행했다.
이에 일부 교수와 학생회는 반대투쟁을 결의하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는 여기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동맹휴학한 학교수는 57개 학교, 인원은 약 4만명에 달했다. 이에 대한 탄입으로 동맹휴학생의 절반 정도인 4956명이 제적됐고, 교수 380여명이 해임됐다.
미군정은 한발 물러서 수정법령을 공포하면서 반대운동은 잠잠해졌고, 3518명의 복학도 허용됐지만, 주동자였던 그는 허용되지 않았다.
1948년 다시 동국대에 진학했고, 1950년 6월 7일 고향으로 내려와 초등교사인 김씨와 결혼했다.
결혼한 지 1주일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간 그는 6월 25일 새벽 6·25전쟁을 맞아야 했다.
그리고 그의 소식은 끓겼다.
그의 아버지는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며 실종신고조차 하지 않았고, 가슴에 한을 안은 채 1978년 세상을 떠났다.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릴 수 없었던 신부도 떠났지만, 호적상 혼인상태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다.
1961년 태어나 형의 얼굴도 모르는 막내동생 신창우(57·전남 여수거주)씨는 10여전부터 각종 자료를 찾아 형의 독립유공자 훈장추서를 신청했다. 정부는 실종자라는 이유로 심의대상에도 올리지 않았다.
그 후 동생 신씨는 광주서중과 동국대 동기로 함께 2차 광주학생독립운동를 주도했던 배종국(92·나주출신 독립유공자)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회장을 만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최근 동생 신씨는 부모와 형의 맺힌 한을 풀기 위해 다시 보훈처에 훈장추서를 신청했다.
신씨의 누님들은 오빠가 혹시 6·25전쟁 당시 납북됐을지도 몰라 몇차례 이산가족상봉도 신청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최근 동생은 바빠졌다. 먼저 행방불명 상태인 형의 실종처리와 이미 사망했지만, 형수의 이중혼인의 호적정리 절차를 밟고 있다.
다시 돌아올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기억해야 할 천재 아나키스트 신균우.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라진 그가 되살아나고 있는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과 역사왜곡, 돈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발상을 꾸짖고 있지 않을까.
최경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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