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강욱 기자] 540조원이 넘는 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공단이 사상 최대의 위기에 빠졌다.
최근 인력 이탈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수장인 문형표 이사장이 긴급체포되는 등 기금 운용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인 '불신' 기조마저 팽배해지며 총체적 난국에 빠진 모습이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이번 사태로 국민연금공단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다.
한 공단 직원은 "출근하고서 (문형표 이사장 긴급체포) 소식을 알게 됐는데 충격이었다"면서 "앞으로 어떻게 사태가 진행될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국민의 기금을 운용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했는데 비리의 온상이 된 것 같아 자괴감마저 든다"면서 "이번 사태로 인해 국민의 불신을 앞으로 어떻게 해소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1987년 설립돼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 국민연금은 지난 8월 기준 가입자 수 2177만4116명, 기금규모 544조6000억원 등으로 지난 30년 동안 세계 3위의 거대 기금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국민연금공단이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이라는 특성상 복지부 장관의 제청 후 대통령이 이사장을 임명하는 점 등을 감안하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인사가 좌우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실제 제1대 장원찬 이사장부터 제15대 문형표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민연금 수장 중 임기 3년을 온전히 채운 인사는 단 세명(4ㆍ9ㆍ13대)에 불과할 정도로 중도 하차한 비율이 80%에 이른다. 역대 이사장 중 6대 최선정, 8대 차흥봉, 11대 김호식, 14대 최광, 15대 문형표 등 5명은 국민연금 이사장직을 전후해 복지부, 해양수산부, 노동부 장관 등을 지냈다.
특히 최광 전 이사장은 박근혜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5월 취임했으나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찬성을 이끌어 낸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의 연임 문제를 놓고 복지부와 갈등을 빚다 임기 7개월을 남기고 중도 사임했다.
현 문형표 이사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있던 지난해 7월 산하 기관인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유무형의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계획을 발표하자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공식 자문기관이던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을 비롯한 국내외 의결권자문기관들은 줄줄이 반대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지분이 전무했던 삼성물산의 가치를 저평가해 총수일가는 득을 보고, 일반 주주는 물론 2대 주주 지위에 있던 국민연금(당시 지분율 11.21%)조차 큰 손해를 보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홍완선 전 본부장 등 내부인사만 참여한 투자위원회를 거쳐 찬성으로 결론냈고 지난해 7월 17일 합병계약 승인을 위한 임시 주주총회에서 찬성표를 던지며 찬성률 69.53%로 가결돼 통합 삼성물산은 실질적인 지주사로 자리매김했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던 간에 우리나라 공적 연금의 근간이고 복지 제도의 핵심인 국민연금의 신뢰성에 커다란 흠집이 남을 것이란 점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국민연금이 기금운용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독립성과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공공성의 목표가 일관되지 않는데다 그동안 정부 쌈짓돈처럼 운영되는 바람에 국민연금 스스로가 선량한 관리자 역할을 포기한 꼴이 됐다"면서 "외압의 내용이나 기준을 명시하고 거부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독립성과 투명성을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강욱 기자 jomaro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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