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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추적] 29년간 봉인된 대선의 진실…의문의 투표함에 비명과 쇠파이프, '그날'은 지옥이었다

시계아이콘03분 04초 소요

부정선거 논란 '87년 구로乙 부재자 투표함' 개함 임박
당시 현장의 3人 증언
12월 16일 오전 11시30분 투표 한창일 때
투표장 밖으로 옮겨지는 투표함 발견
"지금이 자유당 시절이냐" 외침
시민 2000여명 "부정선거 증거" 투표함 뺏어
진상규명 없이 중무장 경찰 진압
"대선 당락에 영향 못 미친다"
문제의 투표함은 선관위 수장고에


[아시아경제 오상도 기자] “말도 마세요. 옥상으로 군복 차림의 진압경찰들이 들이닥치면서 아수라장으로 돌변했어요. 바로 옆 모범택시운전복 차림의 30대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지요.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제게 90㎏이 넘는 거구의 경찰이 발길질을 했어요. 정강이를 맞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김인자(61)씨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날'을 되새겼다.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한 국민의 열망은 이른바 '6·29 선언'을 낳았다. 그로부터 5개월여 뒤 16년 만에 국민은 제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았다.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이래 '통일주제국민회의'라는 허수아비 집단이 모여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던 데서 겨우 벗어난 것이다.

[이슈 추적] 29년간 봉인된 대선의 진실…의문의 투표함에 비명과 쇠파이프, '그날'은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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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 외침에도 발길질…"그곳은 지옥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뒤를 이어 집권당인 민정당 후보로 나선 노태우는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다. 민주 진영의 후보로 나선 김영삼(YS)·김대중(DJ)에 맞서 아찔한 공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때 사달이 났다. 투표가 한참 진행 중인 오전 11시30분께 투표장인 서울 구로구청에서 투표함이 청사 밖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시민들이 발견한 것이다. 시민·종교단체 관계자들은 한 달 전부터 전국적으로 공정선거감시단을 꾸리고 있었다.


[이슈 추적] 29년간 봉인된 대선의 진실…의문의 투표함에 비명과 쇠파이프, '그날'은 지옥이었다


당시 공정선거감시단 구로지역 집행위원장이던 윤두병(69)씨는 "주변에서 '투표함이다', '부정선거다'라는 외침이 메아리쳤고, 사람들이 몰려갔다"고 회상했다. "(투표가 종료되지 않았는데) 투표함이 옮겨지는 것도 이상하지만, 굳이 숨겨서 나올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200여명으로 구성된 '구로구청부정선거항의투쟁동지회'(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슈 추적] 29년간 봉인된 대선의 진실…의문의 투표함에 비명과 쇠파이프, '그날'은 지옥이었다 윤두병씨


시민들은 투표함이 실린 승합차(봉고차) 안을 샅샅이 뒤졌다. 빵 상자와 과장 상자를 헤집어 보니 투표함이 나왔다. 주변에는 호송 경찰도 없었다. "자유당 시대도 아니고 이게 뭐냐"는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에게 대선은 사활이 걸린 결전이었다.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을 잃게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비이락' (烏飛梨落) 같은 사건이 터진 셈이다.
오후 1시30분께 흥분한 시민들은 구청 3층에 마련된 선관위 사무실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백지 투표용지 1500여매와 정당 대리인 도장, 붓두껍, 인주가 묻은 장갑 등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투표 조작에 사용된 물품이라고 믿어버렸다.
오후 4시께부터 구로구청에 모여든 농성자는 2000명(동지회 추산)을 넘어섰다. 이들은 "부정선거"를 외치며 농성에 나섰다. 구청 앞마당은 장날처럼 붐볐다.


[이슈 추적] 29년간 봉인된 대선의 진실…의문의 투표함에 비명과 쇠파이프, '그날'은 지옥이었다 김인자씨


경기도 남양주에 살던 주부 김씨가 구로구청을 찾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는 "구로구에서 부정투표가 자행됐다는 소식을 방송에서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고 기억했다. 당시 5세 아들을 뒀지만, 머뭇거리지 않았다. "(전남) 광주 출신인 남편 친구가 1980년 '5·18' (민주화항쟁) 때 진압군의 총을 맞고 가까스로 살아난 일이 있어 (구로구청 사건도)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투표 당일 동네 노인정 노인들을 상대로 백지 투표용지를 모아 '릴레이투표'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더 흥분했다"면서 "당락이 (여당 후보쪽으로) 기울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패배감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곳곳에서 구로구청으로 몰려온 시민들…"투표함을 사수하라"


구청 마당에선 '목포의 눈물' 등 애창곡을 담은 스피커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밤이 되자 마당 곳곳에서 추위를 달래기 위해 모닥불이 타올랐다. 공정선거감시단 소속 대학생들은 각목을 들고 부정투표함이라고 지목된 투표함을 지켰다. 부정선거가 자행된 유일한 물증이라고 믿었기에 신줏단지 모시듯이 대했다.
이곳에서 밤을 지새운 사람들은 대부분 김씨처럼 방송으로 소식을 전해듣고 달려온 시민들이었다.


[이슈 추적] 29년간 봉인된 대선의 진실…의문의 투표함에 비명과 쇠파이프, '그날'은 지옥이었다 이해관씨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외침이 터져 나왔어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 되느냐는 얘기였죠." (이해관 구로동지회 대변인·53)
구로구청 곳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흐느꼈다. 농성은 이틀을 넘겼다. 사흘째인 18일 새벽 진압경찰이 들이닥쳤다. "어찌나 살벌하던지 너도나도 숨을 곳을 찾아 도망쳤다"고 이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농성 참가자의 2배가 넘는 4000여명의 경찰은 다연발탄을 발사하며 사람들을 구청 청사로 몰아붙였다. 경찰 사복체포조(백골단)는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옥상으로 내몰리던 농성자 일부가 문을 걸어잠갔고, 미처 옥상까지 올라가지 못한 농성자들은 경찰을 피해 건물 3, 4층에서 뛰어내렸다. 이씨는 당시 풍경을 "지옥같았다"고 묘사했다.
이곳저곳에서 욕설과 비명, 누군가 떨어지는 소리가 퍼졌다. 누군가는 머리를 처박고 끌려갔고, 다른 누군가는 매를 맞았다. 당시 서울대 경영학과 3학년이던 양원태씨는 건물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합리적 해법 모색 없이 무차별 진압작전…여당 후보 당선으로 진상규명 미뤄져


경찰에 따르면 당시 농성장에서 1050명이 연행됐고, 이 중 208명이 구속됐다. 30대 주부였던 김씨는 성동경찰서까지 끌려갔다가 초범이라는 이유로 곧 풀려났다. "이송되는 차 안에서 (최루액 탓에) 얼굴에 물집이 가득한 다른 농성자들을 봤다"며 "당시 입었던 옷은 세탁을 해도 최루가스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씨는 지금도 제복을 입은 군인이나 경찰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놀란다. 최루탄 발사기 소리를 닮은 경유차 엔진 소리에 소스라친 적도 여러 번이다. 당시 트라우마 탓이다. 5세였던 외아들이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낄 따름이다.
윤씨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6개월 만에 가석방됐다.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이씨는 2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지금은 국내 굴지의 통신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진압 당시 매를 많이 맞았지만 육체의 상처는 금세 나았다"면서도 "공권력에 대한 과도한 분노나 두려움 등이 부작용으로 남았다"고 털어놨다.
‘1노(盧) 3김(金)’으로 치러진 13대 대선은 야당의 분열 속에 36.6%를 득표한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부정선거 의혹도 노태우 후보의 당선과 함께 쟁점이 되지 못했다. ‘농성자 다수 사망설’ ‘개표 사전 조작’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1년 당시 사건 관련자 3명을 민주화운동 국가유공자로 지정한 것이 유일한 후속조치였다.


[이슈 추적] 29년간 봉인된 대선의 진실…의문의 투표함에 비명과 쇠파이프, '그날'은 지옥이었다


문제의 투표함은 선관위로 되돌아갔다. 투표함은 경기 과천의 선관위 수장고에 들어가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선관위는 4529명의 부재자 투표자 중 4325명의 투표용지가 이 투표함에 담겨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무효 처리했다. 1위와 2위 후보자 간 표차가 200만표 가까이 되는 상황에서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오상도 기자 sd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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