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취한 말들이 시간을 건너가는 풍경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이분법이란 게 모두 맹랑한 것이지만, 그 맹랑함에 기대어 말한다면, 세상에는 뒤끝이 좋은 사람과 안좋은 사람이 있다. 개인이 자신의 체험들을 돌아보며 하는 얘기라면, 그런 분류방식이 잘못 되었다고 굳이 우김질할 일은 아니다. 실제로 겪어봤던 사람들의 통계를 근거로 앞으로 만날 사람에 대해 그런 예측을 한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고개 끄덕일 밖에.
문제는 이 분류의 정보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경우이다. 어느 지역 사람은 어떻다더라,도 무섭지만, 두 사람이 다 아는 어떤 사람이 화제에 올랐을 때, "걔는 뒤끝이 별로 안좋아" 이렇게 되면 거의 그는 구제불능이 된다. 우린 이런 정보에 유난히 귀가 취약하여, 귀끝에 걸린 아주 간단한 추측성 발언에도 마음에 방점을 찍어 두게 된다.
뒤끝이란 말에는, 관계의 앞뒤를 개관하는 눈이 들어있다. 관계를 시작하던 부분과 관계가 지속되던 부분, 그리고 관계가 끝나는 부분. 사탕을 싼 봉지를 생각하면 된다. 접어돌린 앞쪽과 뒤쪽이 관계의 처음과 끝인데, 그 뒤쪽 매듭 부분이 바로 뒤끝이다. 이 뒤끝을 보려면 관계는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끝이 나 있어야 한다.
뒤끝이 좋지 않으려면, 앞과 가운데 부분이 꽤 좋은 쪽이어야 한다. 모두가 나빴다면 뒤끝이 굳이 나빴다는 기억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관계의 모두가 나빴다는 것보다 뒤끝이 나쁜 것이 더 악질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 나쁜 뒤끝이 앞의 좋음을 더욱 나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때의 좋음이란, 다만 나쁨을 전제한 방편이거나 나쁨을 눈가린 전략이거나,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수도 있는 음모를 가진 외피일 뿐이기 때문이다. 뒤끝이 나쁘다는 말은, 요컨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라는 문제를 건드리는 느낌이 있다.
뒤끝은 '뒤'라고 불리는 관계의 결미 부분이 완전히 끝나는 부분이다. '뒤'라는 것은 인간의 등을 포함하는, 신체의 뒷쪽 풍경이기도 하다. 서로 돌아서서 걸어가면 저 등이 보인다. 그게 뒤다. 뒤끝은 그러니까 등돌린 사람이 문득 각각의 방향으로 걸어갈 때 남는 빈 자리에 대한 서로의 해석이다. 뒤끝이 좋지 않다는 것은, 그 빈 자리의 느낌에 관한 설명이다. 그냥 '뒤'가 좋지 않다고 말해도 될 일을, 굳이 '뒤끝'이라고 한 것은, 야박하게 관계의 남은 기운을 싹둑 자르고는 안면을 싹 바꾸는 그 느낌을 담고 싶어서였을지 모른다.
뒤끝이 좋지 않은지 어떤지는 사실 스스로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물론 자기를 성찰하는 끈기나 집중력이 강한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행위에 비추어 다른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졌을 거란 걸 판단해낼 수 있겠지만, 대개 뒤끝이 나쁜 사람일 수록, 자기 중심의 관점들에 갇혀서 그런 게 잘 안보이는 게 세상 원리인 듯 하다. 그러니 뒤끝의 '굿 오어 배드'는 자기가 주장할 문제는 아니고, 남의 평가들이 눈송이처럼 뭉쳐져서 이뤄질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 '뒤끝이 나쁜 사람'이라는 편견성 딱지들을 양산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누구나 다 이별을 겪고, 누구나 다 그 이별의 종지부와 함께 뒤끝을 가지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뒤끝까지도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은 인생공부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왜 뒤끝이 안좋은 일이 일어날까. 인간의 태도와 인간성이 종잡을 수 없는 점을 들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나는, 이별의 전망에다 혐의를 두고자 한다. 뒤끝을 좋지 않게 처리하는 마음에는, 저 사람을 다시 만나지 않을 거라는 속셈이 숨어있다. 만나지 않을 사람이기에, 그간의 호감을 이용해서 내가 약간 득을 본 들 어떠랴 하는 배짱이 숨어있다. 신의가 밥 먹여주나, 뒤끝이 나쁘다고 욕하라지, 하는 배짱이다. 그런데 사람의 평판은 돌고돌며, 인간사는 희한해서 그렇게 갈라선 사람일 수록 괜히 만나게 되어 있다. 얕은 계산으로 본 이득이, 때로 돌이킬 수 없는 짐이 되고 흉터가 되어 있을 때, 꼭 뒤끝 나쁘게 했던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설마 그럴 리가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우연같은 개연성이 자주 사람을 가르친다.
뒤끝이 약간 고약해짐으로써 스스로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뒤끝은 '그 나쁜 뒤끝'으로 당한 사람이 괴로워지는 게 아니라, 가해자의 등에 남는 가책이 더 문제인 경우도 많다. 헤어진 그 사람은 만나지 않을 수 있지만, 헤어진 그 사람과 나쁘게 헤어진 자신을 자신 속에서 문득 만나게 되는 일 말이다. 헤어진 그 사람은 이미 그 일을 잊었다 해도, 그 자신 만은 그 나쁜 뒤끝을 영원히 등짐처럼 지고 살아야 하는 형벌은, 가벼운 것일까.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면, 관계라는 사탕봉지의 마지막을 잘 싸는 일이야 말로, 중요한 일인 것 같다. 헤어짐에도 예절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나의 뒤끝은 어떠한지, 등뒤를 가끔 살피며 살아갈 수 있기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