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인솔한 단원고 前 교감, ‘순직’ 아니라는 법원…그의 죽음, 개인적인 선택에 불과할까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단 하루다. 그 이전과 이후 많은 게 달라졌다. 꿈 많던 아이들이 사라졌다. 시커먼 바다가 그들을 삼켰다. 눈물이 흘러넘쳤다. 부모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2014년 4월16일이 바로 그날이다. 세월호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이 그곳에 있었다. 아이들을 인솔했던 교사 15명도 함께 있었다.
단원고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사건이 벌어졌던 그날 오전, 아비규환의 현장에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는 살아 돌아오고 또 누군가는 떠났다. 단원고 학생 325명 중 250명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숨진 채 발견된 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진도 앞바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도 있다. 사건이 벌어진 후 많은 사람이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수많은 사람이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다.
세월호에 올랐던 그들은 다시 '외로운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다. 세월호와 동행했던, ‘생존자’에 이름을 올렸던, 하지만 스스로 삶을 던졌던 어느 교감 선생님에 대한 얘기다.
강민규 선생님은 단원고 교감이었다. 2014년 4월15일부터 19일까지 5일의 일정으로 제주도로 가는 수학여행 인솔 책임을 지게 됐다.
세월호는 2014년 4월16일 오전 의문의 원인으로 침몰했다. 극한의 공간에서도 아이들은 그리고 선생님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강 교감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강 교감이 세월호 사고 당시 학생 등 탑승자들의 탈출을 도왔다는 내용의 생존자 진술도 나왔다. 강 교감은 사고 당시 저혈당 쇼크로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해경에 의해 구조됐다. 그는 그렇게 목숨을 구했다. 15명의 인솔 교사 중 3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강 교감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생존자 죄책감’에 시달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충격을 경험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구출하지 못한 채 혼자 살아서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정서적 안정과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해양경찰서에 출석해 조사를 받는 등 인솔 책임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조사를 마친 이후 자신의 제자들과 동료 교사들이 숨진 채 인양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4월18일 오후 진도실내체육관 뒤 야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
유서를 남겼다. ‘200명을 죽이고 혼자 살아가기에는 힘이 벅차다. 나 혼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달라.’ 강민규 교감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공무원연금공단은 강 교감 유족이 신청한 ‘순직유족급여’ 지급 신청을 거부했다. 결국 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법원은 “생존자 증후군이 자살을 결의하게 하는 데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강 교감은 교육공무원으로서 공무를 수행하다가 숨을 거뒀다. 하지만 공무원연금공단에 이어 법원도 그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법적으로 순직공무원은 엄격하게 판정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다. 법원의 판단은 한결같았다. 법원은 “심리적 압박감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강 교감의 죽음은 그렇게 개인적인 선택으로 정리됐다. 적어도 법적인 판단은 그렇게 끝났다. 제자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스스로 목숨을 던진 행위를 그저 심리적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인의 선택으로 평가하는 게 타당할까.
목숨을 던지면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 혼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달라'는 유서 의미는 또 무엇이었을까. 그의 선택은 이 시대 '스승의 도리'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느 교감 선생님의 죽음, 사회는 그의 선택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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