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정의화 국회의장이 19대 국회 마지막 제헌절에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통상 내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치권의 관심이 선거로 몰려 개헌 논의가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정치권의 통념인 것을 비춰봤을 때 정 의장이 개헌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그는 17일 국회에서 열린 제헌절 제67주년 경축사를 통해 한국이 마주하고 있는 두 가지 길을 언급했다. 장기침체, 중산층이 얇아지는 호리병 사회(양극화 사회), 물질만능주의가 횡행하는 안전 불감 국가의 길과 혁신을 통한 재도약, 중산층이 두터워지는 항아리 사회, 인성과 공동체가 살아있고 문화가 융성한 삶의 질 강국의 길이 또 다른 선택지라는 것이다. 정 의장은 현재를 어두운 미래와 밝은 미래를 결정짓는 갈림길로 보고, 밝은 미래를 도출하기 위해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을 완수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사실 정 의장이 개헌을 강조한 점은 새로운 부분은 아니다. 그는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한편으로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이번 개헌론이 주목을 끄는 점은 의장으로서 맞는 마지막 제헌절에 제안했다는 점이다. 정 의장은 "실제로 개헌이 이루어지는 것은 20대 국회 이후의 일이 되더라도 개헌에 대한 논의는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간절한 의지를 밝혔다.
이날 정 의장의 개헌절 경축사에는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정 의장은 이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분열과 적대감이 팽배하며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최악인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는 없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는 "헌법 정신인 화합의 공화국이 아니라 분열의 공화국으로 치닫는 현실을 방치한 채 위대한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정치 상황을 두고서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최악', '분열의 공화국으로 치닫는 현실' 등의 표현을 써가며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정 의장의 이같은 판단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그는 이미 여야가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세월호특별법과 예산안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가 이처럼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국회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입법부와 행정부의 갈등관계를 주목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손봐야 한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깨달았을 가능성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 의장은 국회법 개정안 논란이 벌어졌을 당시 여야와 행정부 사이를 중재하며 '번안의결'에 가까운 자구 수정이라는 중재안을 내놨다. 의장에게 부여된 권한을 아슬아슬하게 사용하면서까지 최악을 막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중재는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협상의 축이었던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퇴출에 가까운 사퇴라는 파국을 맞았다. 뿐만 아니라 정 의장이 소속됐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자신들이 찬성한 법안을 재의 불참을 통해 사실상 부결시키는 일들까지 겪게 됐다. 이같은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입법부 수장으로 있는 시간 동안 가장 참담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정 의장은 그동안 4년 중임제 분권형 대통령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통령에게 외교·안보·국방·통일을 맡기되 실질적인 나라 사림은 내각에 맡기는 방식이다. 현재의 모든 권한을 움켜쥔 대통령과는 사뭇 다른 권력구조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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