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종말이 가까워졌구나. 이제야 임자를 만났구나. 지난주 한 대학병원을 찾았을 때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의 끝나가는 운명을 직감했다. 병원은 입구부터 삼엄했다. 열화상카메라가 붉은 빛을 번쩍이며 노려보고 흰 가운의 검색 요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 직원이 초록색의 '열 없음' 스티커를 가슴에 턱 붙여 주더니 옆자리로 안내했다.
질문이 쏟아졌다. 무슨 용무로 왔는가, 예약은 했는가, 최근 한 달 새 다른 병원에 들른 적은 없는가, 열이 나거나 기침을 하지는 않았는가, 다른 이상 증세는 없는가. 생년월일과 이름, 전화번호까지 물어서 적은 문진표를 건넸다. 흰 마스크 한 장이 덤으로 따라왔다.
진료 접수에도 문진표 제출은 필수였다. 까다로운 절차였지만 짜증보다 신뢰가 솟았다. 이 정도면 독한 메르스도 두 손을 들겠지. 한편으로는 메르스에 농락당한 초기 대응이 떠오르며 묘한 배신감과 씁쓸함이 몰려왔다. 처음부터 제대로 대처했다면 온 나라가 휘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메르스가 진정세다. 마스크 행렬도 많이 줄었다. 메르스는 초여름 한바탕 역병 대란으로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안심은 금물, 메르스 대란은 끝난 게 아니다. 메르스의 끝자락에서 우리 안에 도사린 또 다른 메르스의 얼굴을 본다. 또 다른 메르스는 자생적이지만 원조 메르스를 빼어 닮았다. 소리 없이 다가와 어느새 온 국민을 감염시켰다. 원조보다 치명적이지만, 마땅한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다. 무엇보다도 책임 있는 자들의 대응이 원조 메르스의 경우처럼 무능하고 안이해 사태를 키웠다. 또 다른 메르스는 불안, 무기력, 체념이 어우러져 번지는 절망의 증후군이다.
올해도 반환점을 막 돌았다. 하반기에는 무엇이 나아질지 꼽아보라. 가계는 기를 펴게 될까. 기업은 활기를 되찾을까. 청소년들은 일자리를 찾을까, 정치는 민생의 해결사가 될까. 누구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연초에 걸었던 모든 기대치는 추락한다. 설렘은 좌절로 바뀐 지 오래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나 조짐이 없는 무망함, 절망감이 이 땅을 덮고 있다.
경제는 그 상징이다. 창궐한 무기력이 경제를 옥죈다. 최경환 경제팀은 '3% 성장' 사수를 외치며 22조원짜리 캠플주사를 뽑았으나 추가경정예산은 응급처방일 뿐이다.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말했다. "메르스로 경제가 성장경로를 이탈했다. 추경이 없으면 성장률이 2%대로 추락할 것이다." 그의 어법에서 무능했던 메르스 대응이 떠오른다.
보건당국은 처음 메르스 감염률이 '환자 1명당 0.69명'이라 주장했다. 밀접접촉 기준은 '2m 이내에서 1시간 이상'으로 정했다. 메르스는 스스로 힘을 떨쳐 지침의 허황함을 증명했다. 최경환의 화법도 그렇다. 메르스 때문에 성장경로를 이탈한 게 아니다. 경제의 이상조짐은 메르스가 상륙하기 훨씬 전에 나타났다. 분기 성장률은 0%대 행진을 거듭했다. 국내외 연구기관은 경고를 쏟아냈다. 그런데도 '나아진다, 나아진다' 오도하며 시간을 죽였다.
성장률 추락보다 심각한 것은 자신감의 상실이다. 저성장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피로와 체념, 절망의 증후군이자 경제 안의 메르스다. 2%대 성장을 경고하는 최 부총리조차 그랬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한마디 사과도 없었다. 민간 기업에서 반년도 되지 않아 연초에 세운 목표의 달성이 크게 빗나가게 됐다면 책임자에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러나거나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다.
서서히 무너지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다. 한 방에 넘어진 복서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나 무수한 잔주먹에 쓰러지면 그대로 끝장이다. 저성장에 무감각한 경제에 그런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어쩌면 지금 한국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박명훈 주필 pmho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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