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에 떠밀린 정부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관련 병원을 공개했다. 발병 18일 만이다. 병원의 이름을 확인하면서도 두근거리는 국민의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세계 2위 메르스 발병국으로 빠르게 올라서기까지 정부 대응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때문이다.
메르스에 대한 공포가 고조되던 지난주 '자경단(自警團)'이라 부를 만한 일단의 시민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발병 환자와 병원을 추적하고, 예방법을 찾고, 이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으로 열심히 전파했다. 메르스와 맞선 전사의 주축은 '엄마'들이었다.
나에게도 '메르스 메시지'가 날아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상세한 정보가 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환자의 신상은 물론 거쳐 간 병원과 담당 의사 및 간호사까지 망라된 내용을 보면서 과연 진실인지, 괴담인지 혼란에 빠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는 병원과 환자의 정보를 보안에 붙이고 있었으나 인터넷에 '메르스'만 치면 내역이 줄줄이 쏟아졌다. 병원 리스트를 올린 한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달려 있었다.
"도저히 정부를 믿지 못하겠으니, 우리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요. 병원 확인하시고, 다들 마스크 쓰고 외출하세요. 씻지 않은 손은 입에 대지 마세요."
정부를 믿지 못하는 주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결성한 조직이 자경단의 사전적인 뜻이다. 몇 년 전 멕시코에 무장 자경단이 출현했다. 무법의 마약마피아에 주민들이 총을 들고 나선 것이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대응이었다.
이 나라는 의료선진국이라 자부해 왔다. 그런 나라에서 전염병에 맞선 자경단이 등장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것은 '도저히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다. 메르스 공포의 중심에 정부가 있다. 괜찮다고 해도 국민은 병원을 겁내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관광객은 줄줄이 예약을 취소한다.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관광, 유통업, 시장은 울상이다. 가뜩이나 허약한 경제의 뺨을 메르스가 강타한 꼴이다. 경제의 앞날도 걱정이지만, 울고 싶은 정부를 메르스가 적시에 때려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더 크다. 경제 정책의 실패를 메르스에게 덮어씌우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다. 최경환 경제팀은 출범 이후 '경제가 곧 좋아진다, 좋아진다'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국내외 경제예측기관이 다투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춰도 연초에 내세운 3.8%를 고수했다. 하지만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다.
최경환 경제팀과 한국은행에 결단의 시간이 다가온다. 정부는 이달 중에 수출대책을 내놓고 하반기 경제정책방향도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은행은 오는 11일 금통위를 열어 기준금리 인하여부를 논의한다. 성장률 전망치를 크게 내리고, 적극적인 경기 확장책을 동원할 것이 분명하다. 기준금리도 내릴 여지가 커졌다.
경제의 틀을 바꾸는 것은 좋다. 그러나 명심할 것이 있다. 메르스를 정책 실패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경기가 살아나려는데 메르스가 터져서…"라거나 "메르스 충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장률을…" 하는 식으로 떠넘기거나 둘러대지 말라는 얘기다. 지금의 지지부진한 경제는 6개월, 1년 이어진 정책운용의 결과다. 지금의 메르스로 누적된 무능과 무책을 덮을 수는 없다. 정부 말대로 과민한 반응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메르스를 꼭 동원하겠다면 '정부가 잘못 대처한 결과로…'라 표현하는 게 그나마 정직한 태도다.
경제는 심리다.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말이 경제에서도 나온다면 경제는 끝장이다. 국민이 '경제 자경단'을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박명훈 주필 pmho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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