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산악회 회장'을 만난 것은 옛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 전신)를 출입하던 때였다. 그는 평소엔 산업정책을 다루는 고위 공무원이었지만 주말이면 비범한 '산 사나이'로 변신했다. 등산과 얽힌 그의 일화는 전설처럼 떠돌았다. 전국의 유명한 산은 모두 섭렵했고 곳곳에 새 등산로를 개척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기이하게 들린 것은 언제나 혼자서 길 없는 험한 곳으로 다닌다는 그의 산행법. 그래서 얻은 별명이 나 홀로 산악회장이었다.
그를 만났을 때 취재보다 '나 홀로 등산'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렇지만 왜 그런 유별난 산행을 하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런 질문은 흡사 여럿이 어울려 훤하게 뚫린 산길을 오르는 것이 등산 아니냐는 식의 어리석은 주장처럼 들릴 터였다.
대신 밋밋한 질문을 했다. 두렵거나 위험하지는 않은가. 그는 말했다. 설렘은 두려움을 누른다. 위험은 어디에나 있는 것 아닌가. 거대한 멧돼지와 마주친 적이 있다. '절대 너를 해치지 않아' 멧돼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거짓말처럼 멧돼지는 고개를 돌리더니 숲으로 사라졌다. 어떤 들짐승도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거나, 돌을 던지거나, 도망가는 게 오히려 위험하다. 냉정하게 직시해야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나 홀로 산악회장을 떠올리게 한 것은 최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잇따라 비판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다. 문 대표는 얼마 전 청와대 회동에서 최 부총리의 경질을 요구하더니 최근에는 "실패한 이명박 정부의 낡은 지도에 나온 길을 가고 있다"고 공격했다. 문재인이 말하는 '낡은 지도에 나온 길'은 물론 최경환의 '지도에 없는 길'에 대한 패러디다.
최 부총리는 지난해 7월 취임 일성으로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9개월, 그는 과연 지도에 없는 길을 헤쳐 왔는가, 위기를 직시하며 용기 있게 맞섰는가, 아니면 문 대표의 말대로 실패의 낡은 길을 걸었는가.
문 대표가 집요하게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속내엔 4ㆍ29 재보선을 겨냥한 정치적 계산도 없지 않을 터다. 하지만 박근혜정부를 위해서도 '최경환 경제'에 대한 엄정한 중간평가를 해 볼 때가 됐다. 그는 내년 4월 총선에 출마할 뜻이 확고하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올 연말 또는 내년 초에 물러날 것이다. 지금이 바로 재임기간의 반환점이다.
그의 등장은 요란했다. 발언은 화끈했고 행보는 빨랐다. 단칼에 부동산 규제를 자르고 돈을 풀었다. 가계소득 증대를 외쳤고 기업소득을 시장에 돌리도록 압박했다. 급기야 헬리콥터 최, 초이노믹스라는 신조어가 붙었다.
그렇게 달려온 '최경환 9개월'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실패를 말하기는 성급하나 성공의 징후 또한 잡히지 않는다. 누구도 경제가 나아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수는 얼어붙고 서민의 고통은 더 깊어졌으며 청년백수는 넘친다. 부동산거래가 늘어난 정도가 달라진 풍경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지도에 없는 길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목도되는 익숙한 경기부양의 길이었다.
최 부총리에게는 두 번의 심판이 기다린다. 오는 7월 취임 1주년이 첫 번째다. 앞으로 3개월, 역사적 초저금리시대의 효과를 극대화할 것인지, 경제구조개혁의 틀을 구축할지 여부가 관건이다. 두 번째는 총선 출마를 위해 떠날 때다.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경기회복을 이루겠다'고 약속하면서 경제부총리에 오른 그다. 국민과 시장은 그 언약을 지켰는지 심판할 것이다.
최경환 부총리가 진정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면 이런 길은 어떤가. 견위수명(見危授命), '손에 잡히는 경제회복을 이뤄내지 못하면 총선에 불출마 않겠다'고 배수의 진을 치는 것. 그렇게 스스로를 절벽 위에 세우는 용기와 헌신을 국민은 보고 싶다.
박명훈 주필 pmho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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