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었지만 묵은 해는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돈다. 과거를 떠올리는 회고가 넘친다. 광복 70년, 역사의 매듭이 시간을 돌려 세운다.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대한민국 70년 여정은 드라마를 뛰어넘는다. 고난, 희생, 도전, 성취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처럼 힘차게 달려 왔는데 지금은 왜 발걸음이 이토록 무거운가. 그래서 다시 돌아본다.
광복이 전부는 아니다. 또 다른 70년, 분단은 진행형이다. 짧게는 지난해의 묵은 숙제가 목에 걸린다. 맹골수도의 비극에도 나라는 바뀌지 않았고, 청와대 문건의 파장은 계속 이어진다. 웃자고 지어 낸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양이 곱다'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이유다.
과거를 반추하면 현재가 힘든 것이다. 옛 사람 얼굴이 커 보이면 의지할 자가 없다는 말이다. 이병철과 정주영은 경제에서 그런 상징이다. 외환위기 때도, 금융위기 때도 그랬다. 지난 5일자 아시아경제신문에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캐리커처가 나란히 실렸다. 신년기획 '해방 70년사-산업변천사' 편에 나온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치열한 기업가정신과 주저앉은 지금의 경제가 대비됐다.
피난민의 삶을 통해서 본 또 하나의 70년, 영화 '국제시장'도 그랬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덕수의 개인사에 기업인의 편린이 불쑥불쑥 드러난다. 구두닦이 덕수에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거야." 생뚱맞은 말을 툭 던지는 사나이. 그가 젊은 날의 정주영임을 눈치 채기는 어렵지 않다.
한진그룹의 모체인 한진상사로 여겨지는 '대한상사'도 등장한다. 덕수는 전쟁터로 떠난다. 월남전에서 미군 물자를 수송하는 대한상사의 직원으로. 목숨을 건 돈벌이다.
대한상사가 상징하는 조중훈은 또 어떤가.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수송 차량의 선두에 섰던 그다. 그렇게 사업을 키우고 국영 항공사를 인수(지금의 대한항공)해 오늘의 한진그룹을 구축했다. 영화는 '한강의 기적은 기적이 아니라 정주영 조중훈 같은 기업인의 열정과 도전, 수많은 덕수가 뿌린 피와 땀의 결정'이라 말한다.
정주영, 이병철, 조중훈. 고인이 된 이들의 얼굴이 현실과 오버랩되면 심사가 복잡해진다. 이병철, 정주영의 캐리커처가 실린 아시아경제 지면의 바로 앞면에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캐리커처가 나와 있었다. 참으로 묘하다. 그들이 누군가. 정주영의 손자이고, 이병철의 손자다. 미래는 그들의 시대다.
이 땅의 많은 3세, 4세 기업인들은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선대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2세만 해도 창업세대를 지켜보며 자랐다. 엄한 훈육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기업을 키우기도 했다. 생전의 정주영 회장 모습이 떠오른다. 구두는 갈라지고, 식단은 소박했다. 그의 한 아들은 입사할 때 모든 임원에게 고개를 숙이고 지도편달을 부탁했다. 나는 두 손을 모은 아들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3세는 다르다. 세상에서 말하듯 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난다. 유학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가 일으키고 아버지가 물려받은 기업에 들어가 초고속으로 임원 자리에 오른다. 승진 속도만 보면 한국 재벌가의 피에는 우월한 경영의 유전자가 흐르는 게 분명하다.
지난주 조중훈 회장의 장손녀가 구속됐다.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재벌가 3세들을 때리는 죽비 소리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의 기부를 놓고 한 경제학자는 말했다. "그들의 자선은 불쌍한 자를 돕는 게 아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한국의 재벌가 3세, 4세는 선대의 명예와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더 넓은 세상과 만나야 한다. 그것이 반(反)기업 정서를 허무는 지혜이자 용기다.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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