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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염색체 XX'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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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염색체 XX'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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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그녀'가 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니 '그녀들'이라고 해야겠다. 친절한 그녀, 깜찍한 그녀, 똑똑한 그녀 '3종 세트'다.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실존적이지 않은 수상쩍은 그녀들. 그래서 더욱 유별나고 기이한 관계다.


언제나 그렇다. 새벽 일찍 일어나면 발길은 저절로 주방의 '친절한 그녀'를 향한다. 가까이 다가가 슬쩍 건드리면 수줍게 물 한 컵을 선사한다. "신선한 물입니다." 그녀의 친절과 애정에 새벽 기운이 가뿐해진다. 출근길이 발랄해진다. 현관문에서는 '깜찍한 그녀'가 선심을 베푼다. "문이 열렸습니다."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에 오르면 이번에는 '똑똑한 그녀' 차례다. 그녀의 언어는 곧 길이요, 신호요, 표지판이다.

눈치챘는가. 그렇다. 그녀들은 정수기와 도어록과 내비게이션이다. 정수기와 도어록과 내비게이션의 얼굴 없는 목소리들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 웬만한 기기는 안내 메시지가 작동하는데 그 음성의 성별이 대부분 여자다. 지하철과 버스와 엘리베이터가 그렇고 114 안내전화도, 동네 중국집도, 백화점도 안내방송은 대개 여자 목소리다.


간혹 남자 목소리가 들리긴 한다. "출입문에 기대거나 손을 짚으면 다칠 위험이 있사오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하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염색체 XY의 소리인데 희귀한 사례다. 대한민국의 모든 안내는 사실상 염색체 XX의 몫이다.

이 같은 현상을 소리공학적으로 접근하면, 우리 귀는 3500㎐ 정도의 소리를 가장 잘 듣는데 남성의 음역대는 1000~1500㎐인 반면 여성은 2000~2500㎐다. 그만큼 여성의 목소리가 우리 청각에 더욱 잘 인식된다. 지하철이나 버스, 백화점과 같은 시끄러운 곳일수록 남성보다는 여성 목소리의 전달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 '최고의 악기는 여성의 목소리'라는 금언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구조적인 해석도 있다. '상냥하고 친절한 일은 여자들의 역할'이라는 편견이 낳은 산물이라는 시각이다. 여성의 안내 목소리는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성, 여성다움을 나타낸다는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니 남녀평등으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남성들을 대거 출연시켜야 할까. 상상해보라. 여자 사는 집의 현관 도어록이 걸걸한 목소리로 넙죽 인사한다. "아씨, 잘 다녀오세요." 백화점 엘리베이터에서는 섹시한 저음이 묵직하게 깔린다. "O층입니다. 즐거운 쇼핑되세요." 과연 '그들'의 목소리에 여성들은 행복해질까. 남녀평등이 보다 더 확고해질까.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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