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가치투자 대표주자로 인정받고 있는 A운용사. 펀드 환매 바람에 경쟁사들이 조 단위의 뭉칫돈이 빠져나가는데도 끄떡없을 정도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지만 5~6년 전만 해도 사정은 지금과 정반대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시장이 날라가던 시절, A사의 수익률은 42개 운용사 중 꼴찌였다.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눈뜨고 나면 돈이 빠져나갔다. 사장이 운용본부장을 불렀다. "지금 들고 있는 주식들 그대로 들고 가도 될까? 다시 원점에서 검토해 봐라."
며칠 후 운용본부장은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들고 가도 됩니다"고 답했다.
사장은 "그럼 이 주식들 끝까지 갖고 가자. 안 되면 이 주식 안고 죽자"며 운용본부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시장은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다음 해에도 A사의 운용수익률은 꼴찌였다. 바로 앞 순위는 공교롭게도 A사와 가치투자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경쟁사였다. 성장주 위주로 시장이 움직이다 보니 가치주들이 몇 년째 소외를 받았던 것이다.
2년째 꼴찌를 하자 사장은 다시 운용본부장을 불렀다. "정말 그대로 갖고 가도 되는지 재점검 해보자."
며칠 후 운용본부장은 "(가지고 있는 주식들의) 내재가치가 변한 것은 없다"며 그대
사장은 "이대로 살아나지 않으면 이 주식들로 우리 무덤을 덮자"는 결연한 말로 가치투자 원칙을 지켰다.
결과적으로 2년 연속 꼴찌를 했던 A사의 수익률은 이후 급반등했고 이후 수년간 승승장구하고 있다. 사장과 운용본부장 역시 가치투자의 최고 콤비로 인정받으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한때 10조원 가까이 돈이 몰리는 등 잘 나가던 B운용사는 지난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역시 가치투자를 표방하는 B사의 포트폴리오들이 힘을 쓰지 못하자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 해 동안 펀드에 있던 돈의 절반 이상이 빠져나갔다.
다른 종목들은 몇 배씩 주가가 오르는데 B사가 가지고 있는 주식은 제자리걸음을 하니 고객들의 돈은 몰렸을 때보다 더 빨리 빠져나갔다. 한창 힘든 시절, B사 부사장은 가치투자 쪽의 선배인 A사 사장과 식사할 일이 생겼다.
이 자리에서 A사 사장은 과거 자신들이 2년 연속 수익률 최하위를 기록하던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조언했다. "운용사가 절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투자 스타일, 원칙입니다."
모범 정답을 들었지만 B사의 고민이 이 조언으로 바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성장주나 중소형주들이 약진하는 시장에서 가치주를 가지고 버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성장주와 중소형주들은 대형주나 가치주에 비해 오를 때 더 가파르게 오르기 마련이어서 소외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웬만큼 충성도가 강한 고객들이 아니면 다른 펀드는 날라가는데 내 펀드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면 버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업력이 짧은 B사가 느끼는 충격은 과거 A사보다 더 크기도 했다.
B사 부사장은 "솔직히 우리 전략을 계속 고수하는 게 맞나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가치투자의 큰 방향은 유지하되 일부라도 시류에 편승하는 펀드를 만들고 싶은 유혹을 참기 어려웠다. 돈이 몰리는 게 보이는데 이를 모른 체 한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었다.
힘든 상황이 1년간 지속됐지만 B사는 결국 원칙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그 대가는 작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장이 좋아지자 펀드매니저들마저 직접 투자를 하겠다며 회사를 나갔다. 업계에서 B사를 언급할 때면 '위기'란 말이 따라다녔다.
그래도 버틴 결과 희망이 보였다. 바닥을 찍은 수익률은 회복되기 시작했고 펀드 환매도 진정됐다. 아픈 1년이었지만 과거 급성장 시절 다지지 못했던 기초체력을 더 다지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잘 나갈 때 원칙을 지키기는 쉽다. 힘든 상황에서도 지켜야 진정한 원칙이다. 힘든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도 원칙에서 나온다.
전필수 증권부장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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