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배우들이 짊어진 짐이 유난히 무거워 보이는 공연이었다. 뮤지컬 '데스노트'는 스타 마케팅에 힘입어 37회차까지 전석 매진됐다. '엘리자벳', '모차르트' 등에 출연하며 아이돌에서 뮤지컬계 흥행 보증수표로 변모한 김준수(28),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화려하게 복귀한 실력파 홍광호(33)가 만나자 시너지는 엄청났다. 팬들은 캐스팅이 풍문으로 들릴 때부터 들썩였다.
그러나 관객이 아무리 '스타' 때문에 공연을 보러 온다 해도 '스타'만 보고 가지는 않는다. 적게는 5만 원, 많게는 14만 원이나 되는 돈을 내는 이유는 '스타' 외에도 뮤지컬 속 볼거리와 메시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클 수 없는 환호를 받으며 출발한 '데스노트'. 그러나 먹을 것이 소문 이상으로 많은 잔치는 아니었다. 스타들은 연출의 아쉬움을 속으로 달래며 큰 잔칫상을 채우기 위해 분투했다.
'데스노트'는 쿠리야마 타미야(62)가 연출한 일본 라이센스 뮤지컬이다. 2003년 '소년 점프'에 연재된 오바타 다케시(46)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이 만화는 일본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과 유럽, 미국 등 세계 35개국에서 발간되며 인기를 끌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데스노트'가 이렇듯 사람들의 이목을 끈 주요한 이유는 독특한 소재 때문이다.
천재 고교생 라이토는 우연히 데스노트를 줍는다. 여기에는 '이름이 적힌 자는 죽는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데스노트의 힘을 확인하고 싶은 라이토는 TV뉴스에 나온 유괴범의 이름을 적어본다. 그리고 40초 뒤 심장마비로 죽는 유괴범을 목격한다. 이후 라이토는 범죄자들을 하나씩 데스노트에 올려놓는다. 이들을 모조리 죽여 아무런 범죄도 발생하지 않는 이상사회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정의'라고 믿는다. 범죄자들이 연이어 심장마비로 죽자 인터폴은 베일에 싸인 명탐정 '엘'을 투입한다. 이때부터 데스노트를 사이에 두고 라이토와 엘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시작된다.
'스타'라는 절대적인 흥행 요소를 배제한다면 뮤지컬 '데스노트'의 성패는 '원작 만화를 어떻게 무대화 하느냐'에 달렸다. 이름을 쓰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노트,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死神) 등 환상적이고 독특한 소재를 뮤지컬 문법에 맞게 버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판 뮤지컬 '데스노트'는 일본판 연출을 대부분 그대로 가져왔다. 한국판은 2000석 규모의 성남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상연됨에도 일본판이 무대에 올랐던 1200석 규모의 도쿄 닛세이 극장 연출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무대 디자이너 후타무라 슈사쿠는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본 무대와 오케스트라 앞 작은 무대에서 LED 조명이 나온다는 점"이라고 했다.
무대는 연극 무대처럼 철골 구조 몇 개로 단출하게 채워졌다. 이는 현대 사회 특유의 공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역광으로 만든 그림자는 사람들 사이의 익명성을 드러내 시대의 암흑성을 부각시켰고 벽면에 TV뉴스를 보여줌으로써 스토리 전개에 효율성을 더했다.
그러나 뮤지컬 '데스노트'에서 나타난 '무대화'를 위한 노력은 미흡하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46) 순천향대 교수는 "만화 데스노트가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만화에서 봤던 게 실사로 잘 연결되고 판타지가 잘 다루어졌기 때문"이라며 단순히 판타지의 이야기구조만 재현한다고 해서 그런 아우라를 무대에서 구현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되기 위해서는 원 소스의 유명세가 아니라 멀티 유즈가 얼마나 잘 되는가가 중요하다"며 "대극장은 볼거리 같은 대극장만의 미덕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배우들의 힘 덕분에 인내심을 갖고 무대로 눈을 모을 수 있다. 연출의 약점은 역설적이게도 배우들의 수준 높은 가창력과 연기력을 다시 한 번 검증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스타 배우만으로 대단한 뮤지컬이 탄생하지는 않음을 확인시켰다.
김준수는 '엘'이라는 배역에 완전히 몰입했다. 움츠린 채 느린 걸음을 걸으면서도 말 속에는 예리함을 담았다. "분노는 마음을 비추는 투명한 유리창. 정의를 외치는 목소린 공허한 말장난. 순교자 행세를 해봤자 너는 위선자야(The Game Begins 中)". '데스노트'로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라이토를 비난할 때 김준수의 눈빛과 창법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한 음 한 음에 감정의 변화가 드러날 정도로 그 집중은 대단했다.
홍광호 역시 명불허전 탄탄한 가창력을 뽐냈다. 공연을 앞두고 밀도 높고 선 굵은 그의 목소리가 고등학생 역에 녹아들지 우려됐다. 하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음색에 거칠고 날선 느낌을 더해가며 광기에 사로잡힌 라이토를 연기해냈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홍광호는 라이토 그 자체였다.
그러나 기대를 모았던 김준수와 홍광호의 가창 대결은 심심하게 끝이 났다. 둘의 대결 구도는 '대학 입학 장면'과 '테니스 장면' 등에서 줄곧 나타나지만 관객이 그 사이에서 팽팽함과 긴박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둘이 함께 부르는 뮤지컬 넘버의 극적인 면이 부족했던 탓이다. 게다가 둘이 화음이 돋보여야 하는 넘버에서는 낮은 음색의 홍광호가 높은 음을, 높은 음색의 김준수가 낮은 음을 소화하면서 둘의 장점이 극대화되지 못했다. 이보다 더 화려한 팀을 구성하기는 어렵기에 2% 부족한 콜라보레이션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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