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중화 요릿집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벌써 몇 번짼지 모르겠다. 간만에 가족만찬을 즐기려고 단골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그만 숨이 넘어가는 것을 겨우 진정시켜야 했다. '통화 중' 기계음만 고장난 레코드처럼 반복되는 꼴이라니. 도대체 서비스 정신이 있네 없네, 툴툴거리면서도 이미 몸은 조건반사로 주방에 이르렀다. 그래, 자장면 대신 라면이다. 오늘은 내가 요리사다. 내가 쿡남(요리하는 남자)이다.
어제 저녁 일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도 '쿡남' 얘기로 밥상이 어지러웠다. 동석한 두 여인(1은 여자 후배, 2는 홍보실 직원)의 입에서는 연신 차승원, 차승원이다. "어쩜, 얼굴도 잘 생기고 배려심도 많고 게다가 요리까지…" "요리하는 모습이 멋지지 않아요. 이미지가 더 좋아졌다니까요." 맞네, 맞아, 어쩜, 저쩜, 그래, 저래를 연발하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팬클럽에 가입할 기세다. 국자며 냄비며 곱게 리본 달아 '차줌마'(요리하는 차승원의 애칭)에게 선물해줘도 아깝지 않다는 표정들이다.
요남자(요리하는 남자),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 등의 쿡남들이 TV에 나오면 시청률이 뛰고 여성들은 가슴이 뛴다. 저토록 여심을 흔드는 비결은 무엇일까 궁구해보니, 역시나 고정관념을 깬 반전의 매력이 있다. 근육질 몸매의 상남자들이 왼손엔 칼, 오른손엔 국자를 들고 앞치마 휘날리는 모습은 '요리=여성'의 공식을 깨는 일탈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또한 그 반전이 더 없이 섹시하고 황홀하다. 잘 생기고, 덜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 친절하고, 품위 있게 '나만을 위해' 요리하는 모습에 그만 여성들은 에스트로겐의 빗장을 스르르 열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양성평등의 진일보라는 의미도 찾을 수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야 '어디 남자가 요리를' 하고 혀를 차대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집안에서의 남자 일이라는 게 청소, 빨래 널기, 벽에 못 박기, 전구 갈기 따위에서 '여성들의 나와바리(구역)'로 직진해 들어갔으니 양성평등을 향한 인류의 위대한 발걸음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독신의 홀로서기용 방책이요, 나이 들어 마나님 눈칫밥에 대비한 자구책이라는 씁쓸한 해석도 있으니 여성들이여! 수컷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을 베풀어 주시기를. 우야든동 그렇게 사회 노동의 균등이 가사 노동의 평등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진중하고 엄숙한 결론을 내리면서, 이번 주말에도 라면이다. 또다시 '쿡남' 코스프레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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