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다가 뚝, 영화를 보다가 뚜둑, 어떤 날은 옛 노래를 듣다가도 멋쩍게 눈물을 떨군다. 낙엽이 구르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는 소녀들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감성. 며칠 전 만난 공기업 임원 A가 수줍게 고백했다. "요즘은 드라마를 보다가도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이 주르르 흘러, 주책없이. 가족들에게 들킬까봐 눈물을 닦지도 못하는데 그때마다 나이를 먹었구나 싶은 거지."
소싯적 A가 특별히 남성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부드러운 직장 상사에 착한 가장이었다. 그렇더라도 눈물까지는 아니었다. 갑작스런 변화는 스스로도 당혹스럽다. A의 고백에, 대기업 임원 B의 사연이 겹쳤다. 집에서는 엄한 가장이요, 회사에서는 독한 상사였던 그도 요즘 눈물이 부쩍 늘었다고, 얼마 전 저녁 자리에서 넋두리처럼 내뱉었다. "수줍었던 와이프는 날로 거칠어지고 아이들은 머리가 굵었다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데 예전처럼 화를 내지 못하겠는거야. 게다가 얼마 전 입양한 강아지까지…"
B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은, 강아지한테도 서열이 밀린 데 대한 황당함이랄까, 잃어버린 권위에 대한 허탈함이랄까. 숨 가쁘게 달려오다 문득 돌아보니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이제는 서서히 은퇴를 걱정해야 할 시기, 젊었을 적 호기는 무뎌진 지 오래다. 직장에서 후배들에게 잔소리를 할라치면 '노땅'이라는 따가운 시선이 뒷덜미를 덮치고, 집에서 가족들에게 큰소리 한 번 내지르려면 왕따를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현실이 서러워 또 다시 울컥.
중년 남성들의 눈물샘이 빗장을 여는 것은 호르몬 탓이 크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은 남녀 모두 분비되는 데 남성은 테스토스테론, 여성은 에스트로겐의 분비량이 많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남성은 테스토스테론 분비량이 급격히 감소하지만 에스트로겐 분비량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반대로 여성은 에스트로겐이 폐경기 이후 빠르게 감소하지만 테스토스테론은 그대로다. 그렇게 남성은 여성화, 여성은 남성화되는 것이다.
A와 B처럼 중년의 눈물과 잔소리와 좀스러움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다만 속절없이 외로운 저들의 공복감은 뉘라서 달래줄 것인가. 강한 척, 센 척 으스대지만 가슴속은 찬바람 휑한 광야인 중년의 쓸쓸함은 어떻게 치유한단 말인가. 모두가 들뜬 5월 가정의 달, 과연 저들이야말로 위로와 위안이 절실한지 모른다. 향기 짙은 카네이션에 그들은 또 울컥하고 싶은지 모른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