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데스크칼럼]SNS 시대에 다시 등장한 '삐라'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1분 35초

[데스크칼럼]SNS 시대에 다시 등장한 '삐라' 정완주 디지털뉴스룸 국차장
AD

필자가 대학 시절을 보낸 군사정권 시절은 참으로 암울했다. 대학 내에는 사복 경찰의 상주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심지어 강의실에도 알게 모르게 경찰이 감시의 눈을 들이댔다. 극비리에 학내 시위가 일어나면 스크럼을 짠 학생들 사이에는 어김없이 사복 경찰이 끼어들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관심사 중 하나는 정부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어떻게 시민들에게 배포할 것인지 여부였다. 그러다보니 기발한 발상이 등장하기도 했다. 지금은 정치권에 몸담은 선배는 그 분야의 일인자 소리를 듣는 시위 기획자였다. 가투(街鬪)라고 불린 당시 시내 시위의 핵심은 유인물을 살포한 뒤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어떻게 도망가느냐에 달렸다.

그 선배는 궁리 끝에 정말 깔끔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유인물을 겉옷 속에 감춘 채 일단 버스를 올라탄다. 그 시절 버스는 지금과 달리 천장에 환풍구 문이 달려 있었다. 선배가 환풍구를 통해 버스 지붕에 유인물을 쌓아 놓기만 하면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유인물은 자연스럽게 흩뿌려졌기 때문이다. 선배는 다음 정거장에서 유유히 버스에서 내리면 그만이었다.


스마트폰은 물론 인터넷 자체가 없던 시절에는 유인물 외에도 '삐라'(전단)가 중요한 의사전달 수단이었다. 그러나 삐라를 떠올리면 뭔가 부정적인 이미지와 음습함이 풍겨 나온다. 왜 그럴까. 유신 시대에 북한 삐라를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은 트라우마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일본말이 연상되는 기분 탓일까.

삐라의 어원을 톺아보면 일본에서 유래된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벽보나 광고지를 뜻하는 'bill'의 일본어 발음이라는 주장도 있다. 펄럭인다는 의미의 일본어 '비라비라'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그럴듯해 보인다. 가장 유력한 속설은 일본 메이지 시대에 별장을 의미하는 'villa'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외국인 전용 별장을 매매하기 위한 광고지에 대문짝만 하게 적힌 VILLA를 일본인들이 '비라'라고 읽었던 것이 시초였다. 그것이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삐라'라는 발음으로 고착화됐다는 주장이다.


유신 시대도 아닌 21세기에 다시 삐라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서울 일대는 물론 지방에서도 심심치 않게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는 삐라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판치는 대한민국에서 구시대를 상징하는 삐라가 의사전달 수단으로 활용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혹자는 탈북자들의 대북 삐라 살포에 대한 정부의 미지근한 대처를 원인으로 삼는다. 박근혜정부가 대북 삐라에 대해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방치한 데 따른 대응 수단이라는 것이다. 내가 반정부 삐라를 살포해도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처벌하지 않을 테냐는 반발심이다. 경찰의 대응은 당연히 '표현의 자유'를 비껴갔다. 다만 건축물 불법침입이나 경범죄로 처벌한다는 방침을 내세워 오히려 빈축을 사고 있다.


카카오톡과 네이버 밴드, 휴대폰 등 SNS에 대한 정부의 감청 행위가 삐라를 다시 등장시켰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의 무차별적인 감청 때문에 대한민국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 구시대적 유물인 삐라밖에 없다는 풍자적 발상이다.


심지어는 박근혜정부의 행태가 점점 유신 시대로 회귀한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과거지향적인 박근혜 정부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유신 시대를 상징하는 삐라를 동원했다는 것이다.


최첨단 도시를 상징하는 서울 한복판에 삐라가 등장하는 이 현상을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순히 박근혜정부에 대한 반발 심리일까. 또 다른 사회심리학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여러분도 한 번 해답을 찾아보길 바란다.






정완주 디지털뉴스룸 국차장 wjchung@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