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거품이 절정으로 치닫던 2000년 초는 인터넷주를 중심으로 벼락부자들이 무더기로 탄생하고 조금 한다 하는 증권사 직원들은 기본이 억대 연봉을 받던 시절이었다. 2~3년 차에 불과했던 또래 친구들도 일반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의 몇 배는 벌었다. 간혹 친구들끼리 만나면 다시 신입으로라도 증권사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반진반 얘기들이 오갈 정도였다.
당시 이런 얘기를 40대 중반의 증권사 지점장에게 했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부러워할 것 없어요. 증권사 직원 중 40대에도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자기 주위에 집 가진 동료가 없다던 그 지점장의 설명은 이랬다. 증시가 호황일 때는 목돈을 만지지만 문제는 호황기보다 더 긴 침체기를 버티기 힘들다는 것이다. 직급과 근속연수에 따라 일정 금액 이상의 약정을 해야 하는데 증시 침체기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를 달성하기 어렵단다. 할 수 없이 본인과 가족, 지인들의 돈으로 사고팔고를 반복해 약정을 맞춰 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 결국 빚만 늘어난다는 설명이었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은 실속이 전혀 없는 '외화내빈'인 경우가 다반사였던 셈.
최근 만난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들은 '이구동성'으로 '고객수익률'을 얘기했다. 몇몇 증권사는 아예 직원평가 기준도 회사 수익에 대한 기여도가 아닌 고객수익률로 전환했다고 한다.
"고객에게 돈을 많이 벌어주면 회사도 돈을 많이 버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으려는 찰나, CEO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간 증권회사들은 고객과 직원의 희생을 업고서 성장한 측면이 있습니다. 고객의 장기적인 수익률보다 약정을 많이 해 수수료 수익을 챙겼고, 펀드같은 상품도 리스크에 대한 충분한 점검 없이 인기가 있다 싶으면 파는 데 급급했던 게 사실이죠. 그 결과 고객 기반이 상당히 약해진 게 사실입니다."
증시가 침체인 상황에서도 수수료 수익을 맞추려다 보니 직원들의 잦은 매매를 조장하거나 최소한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직원들의 손실로 이어졌다. 회사가 떠안아야 할 리스크를 현장의 영업직원들이 대신 진 셈이다. 이 CEO는 "어떻게 보면 증권사 직원은 보험설계사와 비슷한 측면도 있었어요. 자기와 가족 돈으로 돌리고, 그러다 안 되면 퇴출되고, 다시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라며 과거 증권사의 영업행태를 스스로 비판했다.
7~8년 전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펀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펀드 열풍이 불자 운용사들은 투자자들이 혹할 상품을 경쟁적으로 만들었고 판매사들은 리스크 대신 장밋빛 기대감만 부추겼다. 그 결과 몇조 원어치를 판 회사들은 막대한 수수료 수익을 올렸지만 투자자들은 원금이 반 토막 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당시 충격은 아직 펀드시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증권사는 고객의 돈을 불려주는 값으로 돈을 버는 곳이다. 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 역시 마찬가지다. 고객이 수익을 내 자산이 늘면 자연스레 회사의 수익도 늘어나는 게 정상이다. 문제는 이런 정상적인 형태의 영업구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왔다는 점이다. 수십 년 동안 경쟁적으로 고객 우선, 고객 만족을 얘기했지만 속내로는 회사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증권사나 운용사에 대한 고객의 신뢰는 약해졌고 저금리에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어도 쉽사리 자본시장에 투자하는 것을 망설이게 되는 원인이 됐다. 돈이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자 증권사들은 이제서야 고객수익률이 최우선이라며 각종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삼성증권이 고객 수익률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 서비스를 내놓고, 신한금융투자가 고객수익률 평가제도 3.0을 공개하고, 하나대투증권이 고객수익률에 따라 인사평가를 하는 등의 움직임이 이제는 고객의 수익을 먼저 생각하는 증권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다. 한때 유행했던 '비정상'의 '정상'화인 셈이다.
100세 시대란 말이 나올 정도로 평균수명이 늘어나는데 조기은퇴에 내몰려야 하는 상황에 저금리가 고착화 된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고객수익률 우선이라는 정상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려는 증권사들의 움직임이 좋은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
전필수 증권부장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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