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양의 해가 막을 올렸다. 떼를 지어 다니면서도 결코 다투는 법이 없는 온순하고 평화로운 동물이 양이다. 특히 털을 비롯해 가죽, 고기, 젖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는 ‘유익한’동물이다. 심지어 사람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는 속죄양(贖罪羊) 노릇도 했다. 목숨을 내놓는 희생도 ‘감수’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런 양이 기원전 1만년쯤 전부터 사람과 함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인간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입히면서, 동남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해졌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양의 털은 다양한 인조섬유가 개발되고 있는 지금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섬유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우선 섬유자체의 특성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양모 한 올 한 올의 가장 바깥층은 생선비늘 모양의 스케일(scale)로 싸여있다. 이 스케일은 섬유간의 마찰을 크게 해 방적성(紡績性)을 좋게 하는 한편, 서로 마찰이 커지면 섬유끼리 엉키어 풀리지 않게 된다(felting현상). 물빨래를 하면 줄어드는 단점이 있으나 가볍고 따뜻하고 흡습성이 뛰어나 인류의 오랜 사랑을 받아왔다. 이집트에서는 4000~4500년전의 유물이 발견됐고 덴마크에서는 3000~3500년전의 미라가 양모직물의 옷을 입고 있는 ‘증거’가 발견돼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중세를 거치며 양모직물은 산업으로 발전한다. 양털이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을 바꿔 놓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16세기 유럽인들이 중국 비단과 도자기에 열광하고 있을 때 그랬다.
그 무렵 스페인은 유럽의 절대강자였다. 복식문화에서도 앞섰고, 질 좋은 양모직물 생산지이기도 했다. 새로이 발견된 아메리카 신대륙이 그 양모직물을 필요로 했고, 그곳에는 중국인들이 원하는 은이 많았다. 따라서 중국 비단이나 도자기를 얻기 위해, 먼저 양모직물을 배에 싣고 아메리카신대륙으로 가서 은과 바꾼 뒤 중국으로 달려가는 삼각무역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당시 중상주의를 표방하던 스페인의 왕 필립II세는 상인들을 우대해가며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다. 때마침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깊어져가고 있었다. 구교 신봉자였던 필립II세는 신교 신봉자들인 모직물 기술자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며 종교적 탄압을 함께했다. 견디다 못한 양모기술자들이 무리를 이뤄 네덜란드로 망명을 하고, 그곳에서 영국으로부터 수입한 양털로 모직산업을 일으키게 된다.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그렇게 유럽에서 정치적 경제적인 강국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질 좋은 양털을 생산하면서도 모직물 직조 기술이 부족하던 영국은 훗날 기술을 키워 네덜란드를 능가하는 강국이 된다. 유럽에서 양 때문에 빚어진 ‘나라 팔자 고치기’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백제와 신라에서 일본에 양을 보낸 기록이 있고, 같은 무렵 양털을 원료로 한 직물 이야기도 나온다. 유럽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1954년 이병철씨가 제일모직공장을 세워 수출 길을 열어간 것이 우리로서는 본격적인 모직산업이 된다.
양은 온순하지만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올해는 그 양처럼 서로 화합하며, 큰 힘을 만들어내는 한해가 되길 기원해 본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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