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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계백과 여우, 한국의 가장

시계아이콘01분 09초 소요

"한 나라의 힘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낫겠다."


영화 '황산벌'로 친숙한 백제의 명장 계백이 전쟁에 나가기 전 처자를 스스로 죽이며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결기로 전장에 나간 계백과 5000결사대는 초반 선전을 하지만 결국 패배하고 계백도 전사한다.

계백의 충정과 용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처자식을 죽인 일에 대해선 옛날부터 논란이 있었다. 조선 초기 유학자인 권근은 "도리에 벗어남이 심하다. 비록 국난에 반드시 죽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힘껏 싸워 이길 계책은 없었던 것이니, 이는 먼저 사기를 잃고 패배를 부르는 일이었다"고 비판했다.


반면 조선 후기 실학자인 안정복은 "대체 장수가 되는 도(道)는 무엇보다도 내 집과 내 몸을 잊은 뒤라야 사졸(士卒)들의 죽을 결심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내가 먼저 살고자 하는 마음을 둔다면 군심(軍心)이 해이되어 각각 제 살 궁리와 처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법"이라며 계백을 두둔했다.

개인보다 나라를 우선시하는 봉건시대 유학자들과 달리 요즘 가장이 계백처럼 했다간 집에서 쫓겨나기 십상일 것이다. 영화에선 계백의 아내가 어린 자식을 껴안고 "죽을 테면 너나 죽어라"고 소리친다. 21세기를 사는 감독의 상상이 만든 장면이라 그런지 어린 시절 책에서 봤던 남편의 결정을 의연히 받아들이던 모습보다 훨씬 공감이 갔다.


하지만 의외로 지금도 대한민국 가장들 중에는 계백과 같은 이들이 있다. 먹고 살기 힘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앞서 먼저 자녀들을 앞세우는 일이 잊을만 하면 들려온다. 유럽이나 미국의 가장들은 혼자 자살하지만 한국의 가장들은 꼭 자녀들을 죽이고 자살한다는 얘기가 틀린 말이 아니다 싶을 정도다. 충격적인 서초 세 모녀 사건을 저지른 이와 계백을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 없으면 남은 자녀들이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아들이 글을 배울 무렵 함께 읽었던 그림책 중 일본 여우의 일생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봄에 태어난 여우 새끼는 어미 젖을 먹고 자라다 여름쯤 함께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가을이 되면 독립해서 나간다. 가장들이여. 성장하면 떠나보내야 하는 자식 인생에 조금은 '쿨'해 지자.
전필수 아시아경제TV 차장 phil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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