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을 돌며 사들인 10원짜리 동전 7억원어치를 녹여 만든 동괴(銅塊)로 20억원의 매출(?)을 올린 주물기술자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화폐의 상품화'는 디지털화된 금융시장의 일상이 된 지 이미 오래지만, 전국에 산재(散在)한 채 명목가치로만 연명하던 동전의 실물가치를 복원하여 무려 200%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영업이익률을 달성한 이 '창조적' 재생산활동은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주화의 훼손을 금지한다고 명시한 한국은행법 제53조 2항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29일 금융실명제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뭉칫돈이 은행에서 사라지고 있다.
올 6월부터 10월까지 10개 시중은행의 잔액 1억원 이상 개인 계좌에서 인출된 돈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89조원 증가한 484조5000여억원으로 집계되었다. 이 거액의 화폐는 금과 은이라는 실물로 환치(換置)되고 있다. 한국 금 거래소에 따르면 ㎏당 5000만원가량인 골드바의 판매량은 지난 1월 68㎏에서 10월 132㎏까지 증가했고, 실버바의 10월 판매량도 980㎏으로 4월 대비 2배 이상 급증했다.
5만원권의 퇴장(退藏)현상도 심상치 않다. 2012년 61.7%에 이르던 한국은행의 5만원권 환수율은 올해 1~9월 24.4%로 급감했다. 특히 지난 7~9월 발행된 4조9400억원의 환수율은 19.9%에 그쳐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200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 24일 한국은행 거시건전성분석국은 '실물 및 금융 사이클을 감안한 통화정책과 거시건전성정책 운용' 보고서를 통해 실물 경제가 침체 국면이면서 통화량이 늘어 금융 사이클이 팽창하는 상황이라면 통화정책은 확장적(기준금리인하)으로,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거시건전성정책은 긴축적으로 운용하는 정책 간 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 전문가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 난해한 언사는 결국 금융의 경기순응이론과는 달리 서로 유리(遊離)되어 움직이는 작금의 금융과 실물이 모두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는 고백이자 사후 약방문이다.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춘 금리에도 소비와 투자심리는 개선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디플레이션 공포'는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다가오고 있고, '빚내서 집 사라'는 황당한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1060조원을 돌파한 가계부채는 긴박하게 울리는 경고음에도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는다.
생산, 판매, 소비로 구성된 실물경제는 곧 인간의 일상적 삶이다. 그것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사실처럼 구체적이고 확실하여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고 공식과 지표로 쉽게 요약되지 않는다. 오직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뿐이다. 날이 저물어 사람 사는 구석을 기웃거릴 때 쓴 글과 읽은 글이 모두 무효라는 환멸과 마주 친 소설가 김훈의 '실물만이 삶이고 실물만이 사랑일 것'이라는 통각(統覺)은 삶의 구체성과 사실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를 한탄하는 것이겠지만 실물에 터 잡지 못한 삶과 사랑은 한낮의 몽유(夢遊)처럼 허무하다.
논어에 "자로가 귀신 섬김을 묻자 공자는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으랴?'라 하고, 죽음에 대해 묻자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라 하였는데 사변적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인(仁)을 실천하려는 공자의 사상이 담겨 있다.
지지부진한 규제개혁을 참다 못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낡은 규제도 단두대에 올려 혁명을 이루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부디 이 과격한 발언이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깊고 긴 불황에 부박(浮薄)한 삶을 이어가는 국민들의 실물적 근거를 복원하려는 의지의 표명이기를 바란다. 실물이 희망이다.
정병선 성균관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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