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만났을 땐 죽죽 자랄 것 같던 기자가, 10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경우가 있다. 재기발랄, 열정진정, 분노흥분, 신중엄중, 순발역발을 다 갖췄는데, 왜 편집이 늘지 않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 나름으로 분석한 결과 일정한 공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첫째, 편집이 큰 것인줄로만 알았지 아주 작은 것인 줄 모르는 경우이다. 편집은 꽉 짜여진 여건 속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 같은 기사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다. 그래서 1밀리미터의 차이가 천당과 지옥의 차이다. 이걸 이해 못하는 게 깊은 병통이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의 머리카락을 1밀리미터 들어올리는 힘이 바로 편집이다.
둘째, 편집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올라가는 계단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편집은 올가니즘이다. 올가니즘이어야 오르가즘도 있다. 유기체를 다루는 방식은 유기체스러워야 한다.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편집이 아니다. 늘 다른 문제, 늘 다른 상황, 늘 다른 감각, 늘 다른 포인트에 머리를 들이박고 쑤셔봐야 깊이가 생긴다.
셋째, 편집이 개성이라고, 치밀하고 섬세한 집중 없이 재크 콩나무처럼 엄청나게 자기 식대로 벋어가는 경우이다. 편집이 개성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문법을 갖췄을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기초가 되어있지 않는 개성은 자신의 불행이고 신문의 불행이고 인류의 불행일 수 있다. 기초를 갖추는 것은, 신문을, 자기잣대를 버리고 읽는 사람의 수준으로 겸허하게 읽는 일 밖에 없다. 신문은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고질적인 문제이다. 독자가 그만큼의 똑똑함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기에, 신문이 이 모양으로 주저앉은 것인지 모른다.
넷째, 튀는 것이 편집이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망가지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튀는 것은 편집이 아니라 전략이다. 전략없이 튀는 것은, 프로가 아니다. 신문의 선정성은 고도의 사회적인 문법을 따른 결론이다. 안 튀는 것도 문제이지만 튀는 것이 더 문제인 경우가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튀는 것도 실력인데, 아무렇게나 튀어놓고 스스로 감동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큰 결례이다.
다섯째, 편집기자가 기본적으로 국어기자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문제다. 말을 하면서 수시로 비문을 생산하고 수시로 오자를 내고 수시로 어설픈 논리를 들이대는 이는 결국 편집의 재앙만 키울 수 밖에 없다. 꾹꾹 눌러다져 스스로의 국어를 키우고 어휘를 키우고 지성을 키우고 향기를 키우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 국어가 되지 않는 사람이 편집기자가 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여섯째, 편집은 뉴스를 읽는 힘이다. 뉴스에 접근했다고 기사가 아니라 뉴스를 해석해내고 그것을 표현해내고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키워야 한다. 사진 하나에 감동할 수 있지만 사진 하나에 감동하는 편집은 어쩐지 공허하다. 편집의 본령은 언어에 있기 때문이다. 뉴스를 어떻게 가장 착 달라붙는 언어로 표현하느냐, 그게 편집의 혀이다. 뉴스 속에 들어있는 복잡하고 퀴퀴한 냄새를 어떻게 분간해내서 하나의 후각으로 정리하느냐, 그게 편집의 코이다. 뉴스는 길거리에 채이는 바로 그 일상과 간판처럼 만나는 그 보편의 문제들이다. 익숙하고 확고하고 기사가 될 것 같지 않은 그 뉴스 위에서 편집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편집도루묵이다.
일곱째, 편집의 핵심은 나를 편집하는 힘이다. 자기를 바꾸는 힘이며, 그 바꾼 자기로 신문과 조직을 바꾸는 힘이다.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다시 판갈이하는 저력이다. 공명으로 편집하려면, 혹은 나이로 편집하려면, 혹은 왕년의 내 자랑으로 편집하려면, 이 계를 떠나는 게 낫다. 지금 여기 막 원고지 20매를 받은 마감 5분전의 핏발 선 눈으로 편집할 수 있어야, 필사즉생의 길이 트인다. 내가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편집을 하면서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은 편집이 아니다. 편집기자가 위대해지면 한 편집기자가 신문이 될 수 있고 언론이 될 수 있고 나라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했다면, 이미 편집기자의 싹수는 없지 않을까.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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