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어제 취임사에서 '경제구조와 대외환경의 변화에 상응하는 한은의 역할과 책무 재정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물가안정뿐 아니라 금융안정과 성장 또한 조화롭게 추구하라는 것이 한은에 대한 국민의 시대적 요구"라면서 현행 통화정책 운영체계가 이런 요구를 담아낼 수 있을지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한은의 역할 변화에 대한 새로운 요구를 포용하기 위해 정책목표나 정책수단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진지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혁신적인 발언이다. 일각에서는 한은의 금융감독권 확대라는 해묵은 주장을 또 하려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말 그대로 물가ㆍ금융안정 외에 경제성장도 고려하는 방향으로 통화정책 운영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를 위해서는 한은의 존재의미와 직결되는 정책목표와 정책수단의 수정이 당연히 요구된다. 이런 변화는 금융시장과 금융기관에 대한 한은과 금융위원회ㆍ금융감독원 사이의 감독권 배분 문제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안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변화의 실효성을 확보하려면 한은의 목적 등을 규정하고 있는 한은법의 개정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정부로부터 독립된 국가기관으로서 한은이 갖고 있는 정체성이 흔들릴 수도 있다. 속성상 성장에 치중하기 마련인 정부를 견제하는 안정의 보루라는 것이 현재까지 한은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한은이 성장까지 명시적으로 고려하게 된다면 어디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인가. 무리한 성장에 맞서 안정적 성장을 내세울 수도 있겠고, 단기적 오버슈팅을 견제하는 중장기적 경기변동 평활화를 추구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 총재가 가리킨 방향에서는 한은이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
한은의 정책수단 중에서는 중기 물가안정목표제의 근본적인 개선이 시급하다. 소비자물가가 1년 넘게 1%대에 머물고 있는데도 2.5~3.5%로 설정한 중기 물가안정목표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는 국민과의 소통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이며, 이 총재 자신이 강조한 '국민의 신뢰 회복'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예측가능한 중앙은행이 되려면 이것부터 고쳐야 한다. 이 총재가 이를 포함해 보다 구체적인 한은 혁신 방안을 내놓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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