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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국기에 대한 맹세

시계아이콘읽는 시간53초

한국 국가대표 출신 러시아 대표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이 쇼트트랙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인터넷과 언론의 관심이 뜨거워질 무렵의 어느 주말, 처음으로 소치 올림픽 경기를 시청했다. 마침 빅토르 안과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함께 출전한 남자 1000m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 선수를 응원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 같은데 안현수를 응원하는 마음도 적지 않았다. 안현수가 금메달을 확정하고 빙판에 엎드리는 순간, 감동이 밀려왔다. 그가 두른 게 태극기가 아니라 러시아의 삼색기란 사실이 가슴 아팠지만 그래서 더 감동이 배가됐는지도 모르겠다.


빅토르 안과 안현수란 이름이 '오버랩'되면서 오래전 화제가 됐던 '명자 아끼꼬 쏘냐'란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1992년 이장호 감독이 만든 김지미 주연의 이 영화 제목인 '명자 아끼꼬 쏘냐'는 같은 인물이다. 명자가 일본에 가서는 아끼꼬(明子)가 됐고, 러시아의 사할린에 가서는 쏘냐가 됐다. 지금의 빅토르와 달리 70여년 전의 명자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리 오래 갈 것도 없이 불과 십여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를 외며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귀화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단어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들어가자 '금 모으기' 운동으로 장롱 속 금반지를 내놓던 나라 사람들이었으니 국가대표 에이스의 귀화는 더더욱 생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빅토르 안을 비난하는 여론보다 그가 왜 귀화할 수밖에 없었느냐는 동정론이 더 컸다. 빙상연맹의 파벌주의를 비판하는 데는 청와대까지 나설 정도였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절묘하다. 며칠 전 아끼던 후배가 이직을 한다고 해 술잔을 기울였다. 사표를 내자마자 치열하게 선배와 동기들에게 술로 설득 당했을 그에게 역시 술로 위로를 건넸다. "국적도 바꾸는 마당에 직장을 옮기는 게 뭔 대수냐"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이름 없는 민초들에겐 회사 바꾸는 것도 꽤나 버거운 일이다. 평생 직장이란 단어가 평생 직업으로 대체됐다지만 대부분의 개인들은 빅토르보다 쏘냐쪽에 가까운 게 현실이다.






전필수 팍스TV 차장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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