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태초에 빛이 있으라'를 차용하면 넷(Net)세기의 '인터넷에 댓글이 있으라'쯤 되지 않을까. 태초에 빛이 번쩍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생긴 것처럼 시공간을 넘나드는 인터넷은 댓글이 달리면서 비로소 초현실에서 현실로 귀환한다. 쌍방향성, 익명성, 상호 작용성이라는 미사여구의 기름기를 빼면 인터넷은 결국 '댓글 놀이터'다. 기사나 사진, 영상에 댓글이 달리면서 36.5도의 체온이 깃든다. 고로, 댓글이 없는 인터넷은 팥소 없는 찐빵이요, 방전된 스마트폰이며, 펑크난 스포츠카이자, 미백 효과 없는 화장품이다.
댓글은 또한 유치찬란하면서 원초적이다. 격식을 갖추지 않고 오탈자도 신경 쓰지 않는다. 수질로 치면 3급수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 감정을 배설하고 동질감을 찾는 '정서의 정화'가 이뤄진다.
'피겨 퀸' 김연아가 자신의 마지막 무대인 소치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놓치자 댓글이 들끓었다. '러시아 꺼꾸로 하면 아시러'는 애교 수준이다. 논란의 주인공인 소트니코바가 '판정과 관련된 질문을 받고 싶지 않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누군가는 '우리는 니가 보고 싶지 않다'고 응수했다. 소트니코바가 갈라쇼 도중 깃발에 엉키는 사진이 공개되자 '형광나방쇼'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나비(김연아)도 아닌 나방(소트니코바)의 코미디라는 비아냥의 촌철살인이다.
댓글의 백미는 역시 삼성팬과 애플팬간 설전이다. 삼성팬들은 애플과 아이폰 추종자들을 앱등이(애플과 징그러운 벌레 '꼽등이' 합성어)라고 비하하고, 애플팬들은 삼성과 갤럭시 팬들을 '삼엽충'(고생대 절지동물)이라고 비꼰다. 그깟 스마트폰이 뭐라고 만물의 영장이 아메바 수준의 하등동물로 전락했다. 부모의 원수도 아니건만 적개심은 하늘을 찌른다.
삼엽충와 앱등이 둘다 싫다는 제3의 인류마저 등장했다. 삼엽충은 "갤럭시가 최고다", 앱등이는 "아이폰이 최고다"고 억지를 부리지만 제3의 인류는 "아이폰 쓰고 싶다" 또는 "갤럭시 쓰고 싶다"는 이성적인 댓글을 단다는 것이다.
삼엽충과 앱등이간 설전이 아슬아슬하지만 결국은 격한 관심의 결과물이다. 무관심하면 비판도, 비난도, 댓글도 없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굴욕적인 법이다. 한물간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악플이라도 반갑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래서다. 무플을 질색하기는 기자(記者)도 마찬가지다. 기사에 댓글이 좌르르 달리는 날은 '보람찬 하루'다. 게다가 댓글 중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으니 잘 챙겨보면 종종 월척(특종)의 행운도 누린다.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