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26)
"이곳에 어떤 이가 살고 있습니까?"
"거북 못이니 거북이 살고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러면 거북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까?"
"허허, 그렇습니다. 제가 그에게 거북노인(龜翁)이라고 이름을 붙여드렸습니다. 한양에서 내려온 성암(省巖, 이지번 ?-1575)이 여기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성암이라 하면, 토정(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의 호)의 형을 말하는 건지요?"
"예에. 그러합니다."
"그 형제의 이름은 전부터 들은 바 있으나, 여기에 와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구담주인인 구옹은 고려 때 목은(牧隱) 이색의 자손이지요. 선왕(인종)대에, 숨어사는 선비로 추천을 받아 왕이 '백의재상'이라고 칭송했던 바 있는 사람입니다. 불행히도 왕이 일찍 승하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제대로 쓰일 기회를 잃었지요. 명종조에 들어와서 세도를 잡은 윤원형이 구옹의 아들 이산해(나중에 영의정을 지냄)를 사위로 탐내자 뜨거운 그릇을 집은 듯 모든 것을 놔버리고 이곳 움막 속으로 파고 들었다 하였습니다. 공서가 보시면 마음이 곧 통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두향이 말을 꺼냈다.
"저도, 구담주인에 대해 동리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푸른 소(靑牛)를 타고 다니며 칡넝쿨로 큰 줄을 꼬아 구담의 양쪽 벽에 묶어놓고 학(鶴)같이 생긴 탈 것을 만들어 날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구선(龜仙)이라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 나도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구나. 하나, 신선처럼 보인다고 하여, 노장(老莊)의 도가에 빠진 이가 아니라,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뼛속 깊이 익혀 경세치용을 고심해온, 골수의 유학자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니라." 그러면서 공서를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분이 거북바위 아래 사는 것도, 예사롭지 않은 일입니다. 거북(玄武)은 북쪽을 상징하니, 왕이 계신 곳을 뜻하기도 합니다. 옥새의 손잡이(印 )에도 거북이 새겨지니, 비록 한거(閑居)하는 누추한 지경 속에서도 변함없는 충의(忠義)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북은 겨울과 태초의 혼돈을 상징하기도 하니 가히 걸맞은 점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거북의 등이 하늘처럼 둥글고 배가 땅처럼 평평한 것을 보고 우주의 축소판이라 여겼지요."
공서가 감명을 받은 듯 말했다.
"아아, 그렇군요. 옛 중국의 우임금이 황하의 치수(治水)공사를 벌일 때 대지를 9개로 나누는데, 이것이 거북의 계시를 받은 것이라 들었습니다. 이 거북의 이름이 단구(丹龜)였는데, 단양의 거북이 바로 단구가 아닙니까. 유학의 성군에게 가르침을 준 지혜로운 짐승이 조선의 은둔 유학자 성암 이지번에게 연결되니 참으로 미묘합니다. 이 거북의 등에 씌어진 그림과 글씨(하도와 낙서)가 우주의 비밀을 기록한 홍범(洪範)이라는 얘기도 들은 바 있습니다. 혹여, 저 성암도 그런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사또에게 혹여 단양의 치수(治水)에 대해 큰 비방(秘方)을 주실 수도 있겠습니다."
퇴계가 웃었다. "허허. 그럴지도 모르지요. 충분히 그럴 만한 분입니다. 아마 저 구봉 아래에 깃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동생인 토정(土亭)과 의논을 거친 일일 것입니다."
세 사람은 구담 물가에 있는 단구정(丹龜亭, 200년 뒤 이곳엔 창하정(蒼霞亭)이 들어선다)에 도착했다. 성암과 토정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박한 술자리가 마련됐다. 두향이 거문고를 안고 퇴계의 시 한 수를 읊었다.
아본산야질(我本山野質)하여
나는 원래 바탕이 촌사람이라
애정불애훤(愛靜不愛喧)일세
고요한 걸 좋아하고 시끄러운 걸 싫어하네
애훤고불가(愛喧固不可)하나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나
애정역일편(愛靜亦一偏)이라
고요한 걸 좋아하는 것도 한쪽으로 치우침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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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두향의 손을 잡은 공서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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