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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섬의 스토리]죽기보다 못하다면 자결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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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황후가 된 고려여인 기순녀①

[이빈섬의 스토리]죽기보다 못하다면 자결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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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오의 어린 막내딸, 절에 숨어 있다 붙들려
원나라 '공녀' 대주는 과부처녀추고별감의 손에…
고려 환관 실세가 소녀를 황제에게 소개하니

# 고려 여인 찾아내기, 몽골 특별감시반

고려의 유학자 이곡(李穀)은 원나라(몽골)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붙여 이웃도 알지 못합니다. 황제의황 사신들이 올 때마다 겁을 먹고 수군댑니다. '숫처녀를 잡으러 왔을까? 아내와 첩을 잡아가는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사신이 온 지 얼마 안 있어 군인들이 집집마다 여자를 찾아 다닙니다. 숨기거나 감추면 이웃과 친족을 잡아들여 구속하고 매질하여 반드시 찾아냅니다. 사신이 한 번 오면 나라 안이 소란하여 닭이나 개도 불안해합니다. 사람을 뽑는 기준도 모호합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먹이고 욕심을 채워주면 미인이라도 놓아주고 다른 여자를 찾습니다. 한 여자를 데려가려고 수백 집을 뒤지는데 황제의 명령이니 아무도 거역하지 못합니다. 이런 일이 1년에 한두 번씩 있는데, 많을 때 40~50명이 붙잡혀 갑니다. 선발에 들면 부모와 일가친척이 통곡하는데,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습니다. 국경 밖으로 갈 때는 서로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 길을 막고 울부짖다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이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이도 있으며, 기절하는 사람, 피눈물을 흘려 눈이 먼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습니다."


원나라가 고려에서 여인들을 강탈해간 것은 무려 100여 년간이다. 몽골은 1225년(고종 12년)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고려에 침입하여 항복 조건으로 고려의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00명씩을 바치라고 한다.

1231년(고종 18년)에는 원나라에 항복한 귀순병들에게 짝을 찾아준다는 구실로 공녀(貢女) 1000명을 요구했다. 1274년(원종 15) 원나라는 또다시 공녀 140명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이 일을 위해 결혼도감(結婚都監) 또는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을 설치하여 징발한 여자들을 보냈다.


백성들은 이 징발에 완강하게 저항했다. 대부분 처녀를 요구했기 때문에 이때 조혼(早婚) 풍속이 생겨났다. 입장이 곤란해진 조정에서는 공녀를 보내는 집에 후한 보상을 주는 등 아이디어를 내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역적의 아내나 파계한 승려의 딸 등으로 숫자를 채워 보냈다. 이후 1275년(충렬왕 1년)부터 1355년(공민왕 4년)까지 약 80년간 원나라에 바친 여자는 150명이 넘는다.


공녀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공민왕의 반원정책(反元政策)으로 원나라에 대한 공녀는 끝났지만, 원을 대신해 중국과 만주를 차지한 명나라도 공녀를 요구해왔다. 고려에 이어 조선 초기에도 명나라에 여자를 바쳤다. 여인들을 내주는 수모는 병자호란(1636~1637) 때 다시 재현된다. 참빗처럼 이 강토를 싹쓸이해간 청나라 사내들은 여자들도 쓸어가 버렸다. 이후 돌아온 조선 여인들에게는 환향녀(還鄕女)라는 기구한 딱지가 붙었고, 그들은 평생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다.


# 순녀야, 열다섯 살 내 막내딸아


1331년 고려의 기자오(奇子敖)는 열다섯 살 막내딸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기자오는 슬하에 5남3녀가 있었는데 딸 둘은 무사히 시집보냈으나 막내는 결국 공녀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과부처녀추고별감에서 인근의 절에 숨겨 키우던 기순녀를 찾아낸 것이었다. 기자오의 아내는 이미 실신했고, 그의 오빠인 기철과 기원은 옆에 서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죽기보다 못하다면 자진(自盡)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린 소녀인데도 기순녀는 당차게 말하면서 우는 아버지를 달랬다. 기자오는 총부산랑이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국가에서 시행하는 딸의 공출을 막을 힘이 없었다. 1287년(충렬왕 13년)에 있었던 홍문계(洪文系)의 딸 사건이 나라의 분위기를 더욱 험악하게 만들어놨다. 전 추밀원 부사였던 홍씨의 딸도 공녀 리스트에 올랐다. 충렬왕비였던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로 근친을 가면서 선물로 공녀를 뽑아가는 수색작업에 걸린 것이었다.


홍씨는 딸을 어떻게든 빼보려고 애썼지만 왕비의 위세가 워낙 등등한지라 뇌물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홍문계는 딸의 머리를 깎아버린다. 이를 알게 된 왕비는 홍문계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했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딸은 쇠 채찍으로 온몸을 두들겨 패 살갗이 성한 데가 없도록 만들어버린 뒤 원나라의 사신이었던 아고대(阿古大)에게 주었다. 이때 중신들이 나서서 공신이었던 홍문계의 목숨은 살려야 한다고 간언함에 따라 그는 귀양가게 된다. 이런 분위기였으니 기자오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저 떠나는 딸의 옷소매를 부여잡았다 놓을 뿐이었다.


기순녀는 국경을 넘을 때 왈칵 눈물이 솟았지만, 꾹 참았다. 운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제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거지. 열다섯 답지 않은 표정으로 그는 실신하고 통곡하는 공녀들 옆에서 묵묵히 길을 걸었다. 이 절망과 비참의 길에서 기순녀는 원나라의 내시가 되기 위해 거세한 환자(宦者)인 18세의 박불화를 만난다. 불화는 침착하고 다부진 순녀를 보고 "원나라 황실에 가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귀띔한다. 그곳에는 고려인이 많아 서로 의지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순녀는 불화의 손을 꼭 잡으며, 원에 가서도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원나라는 공녀뿐 아니라 공남(貢男)도 챙겼다. 그 중 하나는 독로화(禿魯花)였는데, 주로 고려 왕족이나 귀족 자제들로 일종의 인질이었다. 이들은 원의 궁중에서 몇 년씩 숙위(宿衛)를 맡다 돌아왔다.


이들 말고 환관 보직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자신의 부친인 원의 세조에게 환관 몇 명을 바쳐 칭찬받았다. 고려인은 판단력이 빠르고 지혜로워 일을 잘 처리하는 솜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고려 왕실에 거세한 남자들을 요구했는데, 이 또한 고려인들은 가기를 꺼렸다. 하지만 여자들과 달리, 환관은 황제나 황후를 모시면서 총애를 받으면 실력자로 클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자원자도 있었다고 한다. 박불화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 고용보의 눈에 띄어 황제의 시녀로


연경으로 가는 뱃길인 통주(通州)의 완평현에는 고려장(高麗莊)이라는 것이 있었다.


고려인 무역상이 고려와 중국 사이에서 국제무역을 하던 곳이다. 고려장은 궁중의 고려 출신 환관과 줄을 대고 있었다. 당시 환관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고용보(高龍普)였다.


어느 날 궁중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기순녀에게, 국경을 넘을 때 만났던 박불화가 다가왔다. 고려장의 심부름을 맡는 환관이 되어 있었다.


"내가 얼마 전 고용보 어른께 너에 대해 말씀 드렸어. 그분이 총명하고 예쁜 고려 소녀를 찾고 계셨거든."


순녀는 물었다.


"그분이 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실까?"


"아무래도 황실에서 일하다 보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빨리 권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말이지?"


"자세히는 나도 몰라. 여하튼 네게는 좋은 기회가 올 것이니 마음준비 단단히 하고 있어."


"알았어. 나를 기억해줘 고마워. 불화 오라버니."


"그래. 나중에는 네가 나를 기억해 줘야 할 거야."


"그래. 알았어."


기순녀를 만난 고용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사로잡는 빼어난 미색인 데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말투가 양반가 출신답게 교양이 있었으며 어리지만 당당한 기품이 느껴졌다. 고용보는 순녀를 당시의 황제인 순제(順帝; 재위 1333~68년)의 다과를 시봉드는 궁녀로 발탁되게 했다. 순제는 어리면서도 신비한 미색을 가진 순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너는 누구이던가?"


"저는 고려의 익주(익산)라는 곳에서 온 지 2년이 되었사옵니다."


"고려라…. 익주는 어디에 있는가?"


"고려의 서쪽 해안 근처에 있습니다."


"서쪽 해안이라면… 나도 열여섯 살 때 고려의 서해안 대청도(인천 서쪽)에 가 있었노라."


"황제께서 어떻게 거기에?"


"황위에 오르기 3년 전(1330년) 황실의 다툼에 얽혀 그곳으로 유배갔지. 한 1년5개월 정도 거기에 머물렀노라. 원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황제가 되었지. 너와 나는 한때 같은 곳에 살고 있었구나. 여름 대청도의 모래밭에 누워 서쪽(중국)을 바라보며 잠들던 기억이 나는군."


절치부심의 시절을 떠올리던 순제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감회가 새로운 듯 문득 다가와 기순녀의 손을 잡았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원사(元史)>의 '후비열전'에는 이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ㆍ기순녀)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


또 이런 표현도 있다.


[이빈섬의 스토리]죽기보다 못하다면 자결하리다

"그는 영특한 성품과 살구 같은 얼굴, 복숭아 같은 뺨, 버들 같은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는 틈이 나면 기순녀를 불러 고려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차를 대령하는 시녀인지라 한적한 시간에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순녀는 순제의 '사랑'을 시봉하는 몸이 되었다.


<11월12일자 26면에 계속>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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