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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강경호의 '푸른 도라지꽃'

시계아이콘00분 40초 소요

다이아몬드 모양의 노린재가/꼬리를 물고/푸른 꽃을 피운 도라지 잎사귀에 달라붙어/수액을 빠는지 꼼짝 않는다/농약을 뿌릴까 하다가 그만 두었는데/금빛 알을 낳는 중이었다/며칠이 지나자/담배씨만한 목숨들이 꾸물거린다/그 사이, 도라지 잎 노린재떼가 갉아먹어/뼈만 남은 생선 같은데/몸이 근질근질 하지도 않는지/도라지는 가장 아름다운 비명으로/푸르게 노래만 부르는 것이다.


강경호의 '푸른 도라지꽃'


■ 살인진드기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인지라 벌레에 대한 공포감이 한껏 커졌다. 당국에서는 '살인진드기'란 말이 너무 살벌하니, 다른 명칭으로 좀 불러달라고 언론에 요청한다. 진드기와는 다른 벌레, 노린재를 시인은 들여다보고 있다. 인간은 벌레도 내 편 네 편을 갈라놨는데, 농작물에 해를 입히는 노린재는 해충(害蟲)이다. 역겨운 냄새를 풍겨 적을 물리치는 그야말로 역겨운 녀석이다. 도라지 농사를 하는 시인은, 알을 낳고 있는 노린재를 죽이지 못한다. 비록 내 편이 아닐망정, 그 신성한 모성(母性)에 농약을 뿌려댈 수 없었다. 그러는 바람에 노린재는 담배씨만한 새끼들을 생산해냈고, 도라지 잎은 뼈만 남은 생선같이 됐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도라지의 탈속(脫俗)을 칭찬하고 있지만, 인간 본위의 삶을 살도록 명령을 받은 존재로서, 알맞은 선택은 아니다. 이 시가 낯설어지면서 아름다운 것은, 적(敵)에게 감정이입하는 무모한 마음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는 때가 몇 번 있을까. 내 편을 내주면서 치명적인 상대편을 감싸는, 큰 선택을 하는 때가 있을까.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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