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가왕' 조용필이 돌아왔다. 그의 귀환 일성은 까마득한 후배 가수 '싸이'에 대한 헌사로 시작된다. 그는 "싸이는 우리의 자랑이다. 싸이의 '젠틀맨'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우리 음악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것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가왕의 헌사에 후배 가수들도 감읍하는 모습이다.
그가 잠시 무대를 떠났던 10년 동안 K팝 등 한류 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강타하고 있다. 그리고 '강남키드'인 오렌지족 출신의 싸이가 나타나 우리 가요사를 새로 썼다. 싸이는 '강남스타일'에 이어 '젠틀맨'으로 새로운 기록을 만들며 지구촌을 흔들고 있다. 그런 싸이에게 보낸 가왕의 헌사는 사실 싸이가 조용필에게 보내야 마땅하다. ''K팝'의 원조' 조용필이 없었다면 싸이나 수많은 아이돌스타가 세계를 누비고 있을 지 의문이다. 싸이가 올라설 수 있었던 'K팝'의 발판은 적어도 조용필이 만들었다해도 틀리지 않는다.
조용필이 데뷔한 1976년 전후의 우리 음악시장은 일본의 엔카 혹은 'J팝'이 판쳤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음악시장의 중심지였고, 일본 노래는 서울 등 도시 거리에서 넘실댔다. '블루 나이트 요코하마'(아시다 아유미), '고이비토요'(이쓰와 마유미) 등 일본 노래는 지금도 50, 60대들에겐 너무도 익숙한 곡들이다. 일본 가요 공연, 음반은 수입 금지돼 있었는데도 이른 바 '빽판'이라고 불리는 일본 가수의 복제 음반과 복제 테이프가 즐비했다.
굳이 음악만이 아니다. 철지난 일본 패션 잡지 '논노'를 끼고 다니는 여대생의 모습은 아주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또한 만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일본 일색이었다. 심지어는 학문, 산업 분야도 일본을 따라가느라 허덕이는 양상이었다. 따라서 문화부문에서 일본을 극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비춰졌다. 조용필이 등장하기까지 불리워진 수많은 노래는 '뽕짝'이라 해서 '엔카풍'의 아류로 여길 정도였다.
그런 형국에 꺼벙머리 청년 '조용필'이 기타 하나 메고 혜성처럼 나타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그 노래는 곧 일본 노래가 넘실대던 다방과 주점, 거리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극일의 신호탄이 쏘아진 것이다. 비로소 우리 노래시장과 국민이 조용필의 노래를 부르며 일본을 이겨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조용필은 노래에서 일본을 이긴 '최고의 문화전사'다. 그러자 이번엔 일본에서도 '한국가요'가 불렸다. 동경 시내의 술자리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한국 가사 그대로 듣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드디어 'K팝'이 'J팝'을 따라잡기 시작한 노래가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조용필은 데뷔 6년만인 1982년 일본 동경 시부야 공회당에서 열린 아시아 5개국 뮤직 포럼에 참가한데 이어 83년 국내 가수 최초로 NHK 콘서트홀에서 단독공연을 펼쳤다. 당시 조용필의 일본 공연은 총 7500여명이 참석, NHK 콘서트홀 개관 이래 최대 관중을 기록해 일본 언론을 놀라게 했다. 입장권은 3500엔, 높은 프리미엄이 붙기도 했다.
NHK콘서트홀은 조용필 이전에 미국의 프랭크 시내트라, 올리비아 뉴튼존, 스페인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등 세계 톱가수들이 서는 뮤직홀로, 막강한 권위를 자랑하던 무대였다.그렇게 조용필은 전입미답의 무대 한복판에 홀로 섰다. 우리 문화 전체가 일본류에 파묻혀 허덕이던 시절, 새로운 길을 홀로 열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가왕곁에는 지금처럼 유튜브도 없었고 SNS 등 다양한 소셜미디어도 없었다.
조용필 노래의 힘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1988년, 한중 수교가 있기 4년전 중국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단독공연을 펼쳤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의 첫 공연이다. 당시 두 나라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고, 사회주의 국가는 '도깨비'들이 사는 세상쯤으로 여겼다. 우리 사회도 군사정권이 서슬 퍼럴 정도로 냉전의 벽은 높았다. 조용필이 베이징에 도착할 때까지 공연 소식은 아무도 몰랐다.
출국 하루전 취소, 장소 변경 등 우여곡절 끝에 공연이 이뤄졌다. 공연 후 스틸 사진 몇 컷으로 전해진 조용필 북경 공연은 한마디로 국내에선 쇼킹한 사건이었다. 공연 후원은 당시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의 막내 딸 '덩룽'에 의해 이뤄졌다. 헌데 조용필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만추'라는 중국노래로 둔갑, 애창되고 있었다.
조용필 노래는 이미 냉전의 벽을 넘을 만큼 글로벌한 '힘'을 지녔던 것이다. 임진규 음악평론가는 "조용필 노래는 로큰론, 트로트, 발라드, 힙합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10대에서 노년까지 여러 계층을 넘어 글로벌 잠재력을 갖췄다"고 평가한다. 조용필 노래의 진정한 '힘'이 어디까지였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가왕이 홀로 싸우는 동안 주변에 그를 도울만한 '가신'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홀로 외로움을 이겨낸 자리에서 싸이도, 아이돌스타들도 춤춘다. 다 조용필에 바치는 헌사일 수밖에 없는 춤과 노래다.
이규성 기자 peac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