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번 생은 베렸어/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괘종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울리는 실내 : 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3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
■ 시가 아니라 연극 대본같은, 아니 배우의 방백같은 말들. 황지우는 첫 문장 "나, 이번 생은 베렸어"라는 말로 나같이 취약한 인생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빼도박도 못하는 절망의 기분을 중얼거리게 했다. 치명적인 문제들을 무대 위에 올려 스스로 행위함으로써, 모방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이 시는 1998년 이전에 씌어졌고 자살 충동의 내면을 포를 뜨듯 전시해놓았다. 이 시를 출산시킨 건, 아내와의 말다툼일 것이다. "당신은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아내가 외출한 뒤, 혼자 남은 남자는 거울을 본다. 그는 죽지 못한다.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다. "당신에게 내가 말했잖아. 나도 내 삶이 맘대로 안 된다고. 마르크스 책도 버리지 못하고, 끓는 주전자처럼 스팀이나 푹푹 내고. 한심하지만 이게 나야." 이 시를 읽은 독자들 중에서, 그의 망설임을 밟고 지나가 정말 가스 밸브를 열거나 베란다 앞에 섰던 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핵심은 그 포즈가 지닌 착란적인 아름다움 같은 것인데, 이것을 유격대 시범조교의 가이드처럼 읽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위험한 시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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