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창익 기자]'본전생각'이란 말이 있다. 이를 떨치지 못하면 필시 망한다. 어느 게임이든 마찬가지다.
작은 놀음판에서도 이 명제를 잊어버리면 곤경에 처하게 된다. 판돈을 잃고 나서 쌈짓돈을 꺼내면 리스크는 커진다. 가진 걸 모두 잃고 빚을 내서라도 다시 판에 끼어 언젠 '행운의 여신'이 자신의 차례로 돌아와 싹쓸이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곤 한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을 때가 돼서야 첫 판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게 얼마나 어리석었나를 탄식하게 된다.
부도 위기를 맞은 용산개발 사업을 보면 이런 상황이 연상된다. 다행(?)인 것은 출자사들이 놀음꾼처럼 어리석지 않다는 점이다. 오는 12일 59억원의 어음 이자를 갚지 못할 경우 부도가 나고, 최소한 자본금 1조원을 허공에 날리게 된다. 코레일 2500억원, 롯데관광개발 1500억원, 삼성물산 640억원 등 30개 주주사가 지분율 대로 낸 자본금 1조원이 바닥난 상태기 때문이다.
30개 출자사들은 31조원 사업을 위해 갹출한 첫 판돈에 별로 미련이 없어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을 날리게 되면 빚을 내서라도 다시 판에 끼려고 하는 게 보통인데 출자사들은 "부도를 감수할테니 먼저 당신이 추가 판돈을 꺼내라"는 식이다.
지난 5일 시행사인 드림허브 이사회가 끝나고 용산역세권개발(AMC)은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코레일이 대승적 차원에서 625억원의 전환사채(CB)를 발행해 12일 부도를 막아주면, 나머지 출자사들도 6월까지는 지분율대로 CB 청약에 나설 것을 약속한다"는 게 골자다. 이사회가 끝남과 거의 동시에 자료를 보낸 것으로 봐서 이사회 전에 미리 준비된 자료로 보인다.
이날 이사회에서 본격 논의될 것으로 예상됐던 4조원 규모의 증자안은 안건에 올라오지도 않았다. 코레일은 앞서 지난달 27일 이사회에서 민간출자사가 1조4000억원을 출자하면 땅값 2조6000억원을 깎아주고 랜드마크 빌딩 2차 계약금 4161억원을 납입해 부도를 막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이같은 제안을 이사회 전날 보도자료로 배포했다.
부도를 볼모로한 치킨게임에서 상대방인 롯데관광이 코레일의 입장을 지지하고 AMC 경영권을 양도하겠다며 백기를 들자 코레일은 바로 공을 다른 민간출자사, 정확히는 삼성물산에 넘겼다.
이후 롯데관광은 다시 코레일이 먼저 625억원을 지원하라며 공을 다시 코레일로 넘겼다. 하지만 코레일은 "이런 식이면 부도로 갈 수밖에 없다"며 받지 않았다. 이제 12일 부도시한까지 5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급한 상황에 처한 셈이다.
놀음꾼과 용산개발 출자사들이 다른 점은 사업의 파트너가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혼자 판돈을 잃는 게 아니니 누군가는 추가 판돈을 꺼내들 것이란 기대감이 없지 않다. 실제 서로의 요구 사항을 보면 잃게 되는 첫 판돈이 많은 순서대로 먼저 돈을 내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방법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될 것 같다.
최대 주주인 코레일은 근본적인 사업방식의 변경과 장기 자금조달이 안되면 정말 부도를 감수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2대 주주인 롯데관광은 더 이상 판돈이 없다. 삼성물산 역시 부도가 나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 건 아니어서 추가 판돈을 생각하지 않는듯 하다. 서로 '네가 먼저'란 자세를 버리고 대주주들간의 막판 대타협을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하다
김창익 기자 wind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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