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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 18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1분 29초

개이야기가 뜬금없이 윤여사의 고향이야기로, 거기서 다시 고모할머니 이야기로 옮겨졌다. 고모할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윤여사의 얼굴엔 깊은 추억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처음 보았을 때 한없이 경박하고, 가볍게 여겨졌던 그녀의 눈가에도 자세히 보니 마흔의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잔주름이 세월의 흔적처럼 가늘게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작은 핸드백을 꺼내 무언가를 꺼내었는데 담배였다. 이제껏 참고 있었거나, 끊었다가 이런 순간처럼 어쩌다 생각나면 한 개피 피우는 것 같았다.
“태울래요?”
윤여사가 먼저 하림을 향해 담배갑을 내밀며 말했다.
“아니. 됐어요. 끊은 지 좀 됐어요.”
하림이 사양하자 그녀는 동철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제가 아까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계곡이 있다고 했죠. 마을은 한 이십여호 되는데 거기서 걸어서 약 십분 되는 별로 멀지 않은 곳이죠. 서서 빤히 보이는 정도니까. 계곡이라 했지만 그냥 아담한 골짜기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거예요. 그런데 그 계곡을 따라 몇 년 전부터 띄엄띄엄 외지에서 사람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어요. 주로 서울 사람들이죠. 경치가 그런대로 괜찮은데다 저수지도 있고, 과수원도 있고, 무엇보다 조용하니까요. 요즘 서울 근교에 어디에나 그렇게 서울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걸 흔히 볼 수 있잖아요?”
그녀는 담배 연기를 훅, 하고 뿜어내고 나서 하림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게 개이야기하고 무슨 상관이람. 동철이 말마따나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 괜히 너무 뜸을 들인다 싶었다. 그러나 윤여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 중에 딸 하나를 데리고 들어와서 사는 영감이 있었어요. 이층집에서 살아 다들 이층집 노인이라고 불렀죠. 성이 박씨라든가.... 나도 본 적이 있는데 명태처럼 빼빼 마르고 키가 큰, 인상이 아주 고약하게 생긴 칠십대 초반 쯤 되는 영감이었어요. 무슨 일로 고향에 갔다가 길에서 마주쳤는데 운전대 쪽에 앉아있는 나를 흘낏 쳐다보더라구요. 아니, 쳐다보았다기보다 쏘아보았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네요. 하긴 낯선 차를 타고 웬 여자가 지나가니 그냥 쳐다본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분명히 기분 좋은 눈빛은 아니었어요.”
“그럼, 그 영감이....?”
윤여사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하림은 다소 초조한 기분이 들어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윤여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림은 순간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냐? 뜸만 오래 들였지 알맹이는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 아닌가.
요약하자면 혼자 사는 윤여사의 고모 할머니가 누렁이 두 마리를 키우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날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이층집 노인의 엽총에 맞아 죽었다. 그래서 고모 할머니가 실성을 했고 동네가 난리를 피웠다. 그 정도였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고, 듣기에 따라선 별 것 아닌 이야기일 수 있었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별별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개가 엽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여 법석을 떨 일은 아니지 않은가.
유여사는 그런 하림의 마음을 이미 헤아리고 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다들 그렇게 추측을 하고 있죠.”
“추측이라니....?”
“그래요. 아무도 실재로 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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