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주여성들, 장맛비 속 사망 추모집회
[아시아경제 나석윤 기자]최근 몇년새 10명의 결혼 이주여성이 가정불화와 남편 폭력으로 사망했다. 올 들어 벌써 3명째로 그 중 2명은 이달에 운명을 달리 했다. 베트남 출신 한 여성은 입국 한 달만에 남편의 무차별 폭행으로 갈비뼈 18대가 부러져 죽었고, 캄보디아 출신 여성은 보험금을 노린 남편의 방화로 세상과 이별했다. 집 안에 감금 중이던 이주여성이 아파트 9층에서 밧줄에 의지해 탈출하려다 떨어져 사망한 일도 있었다.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남성과 결혼해 이주한 외국인 여성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모두가 남편의 반인권적 행태와 가정폭력에 신음하다 응어리 진 한도 달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같은 이주여성의 현실에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시민단체들이 나섰다. 18일 낮 이주여성단체들은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서 사망한 이주여성들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가 진행되는 내내 이주여성들은 '이주여성들이 죽지 않을 권리'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굵은 빗속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 자리에서 중국 출신 이주여성 최설화(31)씨는 지난 4일 사망한 고(故) 김영분(31, 중국)씨를 추모하며 통곡했다. 김씨는 지난 2001년 남편 현모(43)씨와 결혼해 한국에 왔다가 남편의 폭력으로 4일 동안 뇌사상태로 있다 사망한 중국 출신 이주여성이다.
최씨는 "내 친구가 사랑스런 딸들에게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슬픈 운명의 주인공이 돼 버렸다"며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았을 텐데 하늘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울먹였다.
그는 또 "외국인 신분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에게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은 엄청난 비극"이라며 "얼마나 때렸으면 사람이 의식 회복도 못하고 죽을 정도가 되냐"고 끝내 울분을 토했다. 집회에 참가한 이주여성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죽게 내버려 두지 마세요"라고 호소했다. 이주여성들에게 죽지 않을 권리를 달라는 절규였다.
또 다른 한 이주여성은 "우리는 이렇게 죽으려고 한국에 온 것이 아니다"며 "이주여성들의 두려움과 달리 한국사회는 너무나 조용하다"고 꼬집었다. 얼마 전 생을 마감한 리선옥, 김영분 씨를 언급하는 대목에선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낭독문을 든 그의 손은 한 없이 떨렸고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쳐내며 호소를 이어 갔다. 그는 이주여성에게 위협이 되는 한국남성들의 폭력을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스스로 체류권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관련 법안을 개정해 달라고 읍소했다.
현장에 함께한 강혜숙 대구 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사람이 죽는다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 아니겠냐"며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은 이주여성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는 한국남성들의 인간성 회복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집회에 동석한 영화배우 유지태 씨는 "같은 한국 남자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다행히 (이주여성들의) 체류기간과 관련해 친족 확인, 보증 내용이 법무부 쪽에서 삭제됐다고 하니 앞으로는 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나석윤 기자 seokyun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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