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정구(李鄭具)'라는 소설이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소설 부문 1위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에 사용된 한자가 다소 생경하게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삼성과 현대, LG 그룹 창업자의 성을 조합해서 가상의 재벌그룹 총수의 이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삼현그룹은 당대 최고 재벌 그룹이지만 3대에 이르는 세습과 비자금 축적 등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는다. 후계를 둘러싼 자식들 간의 분쟁, 가신들의 반란 속에 이정구 회장은 앞만 보면서 달려온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깊은 성찰 끝에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뒤 의미 있는 일에 여생을 바치게 된다. 소설이니까 이런 이상적인 결론이 난 것 아니냐고 미리 체념하거나 삐딱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미국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해 대부분의 재산을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고 빈곤과 질병 퇴치에 나섰다. 젊은 나이에 정보기술(IT)로 전 세계를 정복한 천재가 글로벌 빈곤과 질병 퇴치도 가능한지 응원을 겸해서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걸 본 금융계의 최대 거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더웨이 회장이 통 큰 기부를 했다. 전 재산의 85%인 374억달러를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넘긴 것이다.
온라인 주식거래 회사인 사이버코프를 만들어 억만장자가 된 필립 버버는 '글리머 오브 호프(A Glimmer of Hope)'라는 개인 자선단체에 1억달러를 기부했다. 그는 회사를 매각한 후 아예 사회사업에 나섰다. 기존 구호단체의 덩치가 커지면서 엉뚱한 인건비와 사무 비용에 돈을 쓰느라 정작 구호사업에 들 돈이 줄어드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자선단체 운영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자 마이클 델(델 컴퓨터 창업자)이나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이 잇달아 버버의 재단에 거액을 기부했다.
대규모 부호는 아니더라도 미국에는 젊은 나이에 돈을 벌어 어느 정도 자아 성취가 이뤄진 후부터는 소속된 커뮤니티와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고 활발하게 자선활동을 하는 부유층이 적지 않다. '젊고 부자이면서 바람직한 사람(young and wealth but normal)'이라는 뜻의 '욘(yawns)족'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정구라는 책에서 전직 고위관료 출신이자 미래학자인 저자(이영탁)는 2011년 초 튀니지와 이집트 등에서 일어난 재스민 혁명을 보면서 '혹시나 기업이 시민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의 공격 목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책을 기획하게 됐다고 한다. 아무리 나쁜 정치권력이라도 5년이면 바뀌지만 재벌권력은 자녀세습으로 대대손손 이어지기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기업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고 고용을 하고 그 과정에서 저축을 하거나 주식을 산 중산층에게 이자나 배당을 지급해 금융시장을 존속하게 하는 경제성장의 동력이다. 일부 재벌가 사람들의 잘못된 세습이나 파행적 행동, 중소기업을 외면하는 나 홀로 정책 때문에 기업 그 자체가 공공의 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근본을 흔드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이정구-벌족의 미래'라는 기묘한 제목의 이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도 일반 사람들의 재벌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각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워런 버핏은 '오마하의 현인(賢人)'으로 불린다. 아무리 천재적인 금융투자자라 하더라도 재산의 85%를 자선사업에 내놓는 그의 인품이 아니라면 현인으로까지 불리지는 못할 것이다. 통 큰 기부를 하고 '현인' 소리를 듣는 그런 재벌을 우리나라에서도 보고 싶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희망일까.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시니어비즈니스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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