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일본차가 있다!"
누군가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한 무리의 젊은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이들의 발악에 자동차는 금세 뒤집어졌고 이내 불타올랐다. 미-일간 무역 분쟁이 들끓던 1980년대 중반, 미국은 그렇게 반일 감정에 들썩였다. 광기가 휩쓸고 간 어둠이 거치면 밤새 불탄 일본 자동차의 잔해가 처참한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는 무법 천지였다. 일본 기업에 다니는 직원(일본인은 물론 미국인까지도)들은 폭력의 표적이었다. 혹시나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찾아다녀야 했다. 한 중국계 청년은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야구 방망이에 맞아죽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훗날 역사는 이같은 광기의 혈흔을 '재팬 배생'으로 회고했다. ‘배싱(bashing)의 사전적 의미는 '맹비난' 또는 '강타'다. 재팬 배싱은 일본을 겨냥한 미국의 폭력이었다. 곱씹어보면 이는 결국 흑자 잔치를 벌이는 일본 기업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격지심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배싱'이 굿판을 벌이고 있다. 표적은 다름아닌 '대한민국 기업'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죽자고 덤비니 기업들은 견딜 재간이 없다. 선거철마다 도지는 병이지만 총선·대선이 겹친 올해는 도를 넘었다. 게다가 '초법적'이니 말문이 막힌다. 다른 정권도 아니다.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내세운 이명박 정권에서다. 전봇대를 뽑겠다더니 되레 곳곳에 초법적인 장벽을 둘러친 꼴이다.
얼마 전에는 새나라당의 총선 공약이 기업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이동통신 요금 20% 인하, 롱텀에볼루션(LTE) 무제한 무선인터넷 요금제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이다. 얼핏 그럴 듯 해보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해외 토픽감'이다. 무리하게 밀어붙일 경우 '풍선 효과'로 요금이 오히려 올라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유 업계는 또 어떤가. "기름값이 묘하다"는 이명박 대통령 발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정유업계는 마지못해 리터당 100원씩 인하했다. 그 결과 정유사들은 70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기름값은 원상 회복했다. 정부가 유류세를 수술하지 않고는 '언발에 오줌 누기'임이 입증된 것이다.
금융권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2008년 9월 영업정지된 부실저축은행 피해자 보상을 위한 특별법 때문이다. 금융 업계는 보호한도 5천만원으로 정한 예금자보호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태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색하고 못박는다. 기업 개혁을 추진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곪은 것은 잘라내고 썪은 상처는 도려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두가 법과 원칙을 따라야 한다. 지금의 기업 배싱은 '표(票)퓰리즘'에 기댄, 이성이 상실된 정치권의 폭력일 뿐이다.
보수층이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성토했던 노무현 전 정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법과 원칙이 명확했다. 아파트 분양가 원가 공개가 논란이 일자 노 전 대통령은 시장 경제에 거슬린다면 딱 잘라 반대했다. 지지층이 반발했지만 법과 원칙을 내세웠다.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면 정권을 잡은 이명박 정부는 오히려 시장 경제를 훼손시키고 있다. 그 결과는 기업에 대한 불신이다. 대외 신인도 하락도 우려된다. '저기 기업이 있다'는 말 한 마디에 모두가 달려들어 가해지는 폭력은 두고두고 우리 경제의 불행이다. 재팬 배싱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에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인 것처럼.
이정일 기자 ja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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