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조범자 기자]협회의 정관? 무시했다. 기술위원회 논의? 그런 절차 필요없다. 대표팀 감독 권위? 신경 쓰지 않는다. 매년 수백억 원씩 협회를 지원하는 중계 방송사와 스폰서의 입김? 매우 중요하고 두렵다.
월드컵 4강 진출국으로 자부하는 대한민국 축구의 2011년 현주소다. 대한축구협회가 만든 정관은 있으나마나 한 무용지물이 됐고 적법한 절차로 대표팀 감독의 선임과 해임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기술위원회의 존재는 헌신짝처럼 내팽겨쳐졌다. 오로지 '높으신 분들'의 입맛과 방송사·스폰서의 질타 만이 걱정될 뿐이었다.
대한축구협회가 8일 오전 조광래 A대표팀 감독의 해임을 공식 발표했다.
황보관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8일 신문로 축구회관 5층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어제 조광래 감독을 만나 사임을 권유했다. 그동안 대표팀의 경기력과 대표팀 운영을 볼 때 최종예선을 거쳐 본선까지 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로써 지난해 7월 축구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조광래 감독은 1년5개월 만에 지휘봉을 반납하게 됐다. A매치 성적은 21경기에서 12승6무3패.
감독의 자리는 언제든 올 수 있고 또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리다. 문제는 축구협회가 얼마나 적법한 절차와 논리에 의해, 또 얼마나 합리적이고 세련되게 감독 선임과 해임의 이슈를 해결하느냐에 있다. 이것이 행정력이고 이것이 각국의 대표팀과 클럽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아직 한참 멀었다. 조광래 감독 해임 건으로 축구협회의 행정력이 대한민국 축구의 경기력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 지를 다시 한번 입증한 꼴이 됐다. 많은 축구인들과 팬들은 축구협회에 대한 비난을 넘어 부끄럽기까지 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감독의 지도력을 평가하는 공식적인 자리가 없었다. 기술위원회는 각급 대표팀을 이끌 지도자를 선임하고 해임하는 논의를 하는 기구다. 축구협회가 만든 정관에 나와있다. 하지만 이번 해임 사태에서 기술위원회는 철저히 배제됐다.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새 기술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내린 결정이다"며 "아직 신임 기술위원 인선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최근 한차례 비공식적인 모임에서 (해임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기술위원들이 자세한 내용을 알지는 못한다"며 앞뒤가 맞지 않은 설명을 했다.
여기에 스폰서와 방송사의 '입김'이 문제가 됐다. 황보관 위원장은 "공식 스폰서들이 축구협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다. 이번에 문제점을 제기한 것도 사실이다"고 털어놔 논란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축구협회가 대표팀 감독에겐 절차를 무시한 채 권력을 휘두르고, 스폰서와 중계권을 가진 방송사의 한마디에 꼬리를 내렸다는 걸 인정한 셈이다. 조광래호가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부터 장담하기 어려운 위기에 놓였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매우 우려스럽고 조광래호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아보인 것도 맞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규정과 절차를 무시한 채 수십년 전으로 역주행하고 있는 축구협회의 행정력과 행보가 조광래호보다 더 암울하고 어둡기만 하다.
스포츠투데이 조범자 기자 anju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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