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와 함께한 제주항공 다문화가정 껴안기 1년
13인 다문화가정에 무료 고향집 방문 혜택
1주년 맞아 3년 만에 딸과 함께 친정 나들이 남파씨
열린의사회 의료봉사단 20인 현지 자원봉사
[케손(필리핀)=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제주항공과 본지가 함께 마련한 필리핀 다문화가정 고향 보내주기 프로그램이 어느덧 출범 '한돌'을 맞았다. 지난해 11월24일 마닐라 첫 취항일의 주인공인 델마 C. 베게라(33) 가족을 시작으로 지난달까지 총 13인의 다문화가정(첫 달 2가족 특별 선정)이 제주항공 덕분에 무료로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본지 기자의 동행 취재는 첫 회에 이어 두 번째. 특히 이번에는 제주항공 다문화가정 고향 보내주기 캠페인의 1주년을 기념해 열린의사회와 의료 봉사단을 꾸려 각별한 의미를 더 했다. 지난달 27일부터 31일까지 의료진과 자원봉사단 등 스무 명이 함께 한 밤낮의 생생한 현장을 이제부터 소개한다.
◆제주항공 다문화가정 껴안기 '벌써 일년'=어색한 첫 만남은 지난달 27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시작됐다. 취항 1주년을 기념한 이번 캠페인의 주인공 님파 불라완(31)씨는 딸(김문희ㆍ4)과 친여동생 데일린 C. 불라완(29), 갓 돌을 지난 조카(김무경)를 데리고 3년 만에 고향집을 찾게 됐다.
5년 전 한국 남자와 결혼한 님파는 9명의 형제자매 가운데 일곱째다. 한국에는 님파 외에도 둘째 언니와 여덟째 동생이 살고 있다. 9년 전 가장 먼저 다문화가정을 꾸린 언니가 안정적으로 정착한 것을 지켜본 님파와 여동생이 줄줄이 한국행을 자처한 것이다.
님파는 "언니와 여동생이 한국에 살고 있지만 (살림고에) 자주 만날 수가 없다"면서 "딸 문희가 예쁘게 많이 자란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어 신청했다"고 말했다. 광주에 거주하고 있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인상적이던 데일린은 "육아 문제가 겹치면서 다문화가정으로 산다는 게 힘겨워졌다"며 "심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언니와 제주항공 덕분에 고향집을 갈 수 있게 돼 너무 기쁘다"고 전했다.
제주항공이 여성가족부 산하 전국다문화가족사업지원단과 손을 잡고 필리핀 다문화가정 고향 보내주기 캠페인을 벌인지 벌써 일년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다문화가구 수는 총 38만6977가구로 집계됐다. 전체 가구의 2.2%에 해당한다. 국내 거주 중인 필리핀 출신 다문화가정은 2400명으로 중국과 베트남, 미국에 이어 많다.
1년 전 상품을 기획했던 담당자인 제주항공 영업전략팀 조민 대리는 이번 동행 취재에서 "당초 예상보다 지원자가 많고 파급력이 커 12개월로 준비했던 캠페인을 무한 연장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팔 잘린 아버지에 "좋은 딸 둬서 행복하시죠"=필리핀 마닐라에서 차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퀘존 바랑가이. 한적한 어촌마을은 님파의 고향 방문으로 이틀 내내 들썩였다. 이웃집 밥상 위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지내는 바랑가이 주민들은 님파가 한국에서 의료 봉사단을 이끌고 금의환향한다는 소식을 미리 접하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29일 오전 진료를 마치고 님파 친정집을 방문했다. 오른 팔뚝이 잘리고 한쪽 시력은 잃고 왼쪽 다리가 마비 돼 감각이 없는 아버지 베니토 불라완씨 치료를 위해 봉사단 '대장'을 맡은 한의사 이주연(44) 단장이 함께 했다. 올해로 67세인 님파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수줍은 듯 반갑게 맞았다. 건강한 풍채의 베니토는 1969년 배가 폭발하는 사고 이후 40여년 이상 불편한 생활을 거듭해 왔지만 9남매 자식 농사를 잘 지어 동네에서 금슬 좋은 부부로 통했다. 소녀 같은 순수한 미소를 가진 어머니 곤라다 불라완은 배가 종종 아프다면서 남편 옆에 누워 침을 맞으면서 시종일관 행복한 얼굴이었다.
딸 셋을 한국으로 시집 보낸 덕분인지 님파 친정집은 현지에선 중산층 이상에 속했다. 지난 25년 동안 필리핀 특유의 나무로 만든 집에 거주하다 최근 전체를 수리해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가 다른 집들과는 달랐다. "좋은 딸을 둬서 행복하냐"는 님파의 짓궂은 질문에 부부는 말없이 환히 웃었다. 어느새 동네 터줏대감 집에는 30여명이 몰려 광경을 즐겁게 지켜보며 하나가 돼 있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그들을 데리고 다시 의료 봉사 장소로 이동했다.
◆"우리는 지독한 봉사 중독자"=의료 봉사단은 첫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28일 의료 봉사 첫째 날 오전 의료 기구를 준비하고 오후 진료를 개시하던 즈음, 일이 터졌다. 의료진은 일제히 "'딜리버리(Delivery)' 환자가 생겼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분만을 앞둔 필리핀 여성이 불쑥 들이닥친 것이다.
봉사단의 '여성 대장'이었던 양훈진 산부인과 의사(42)의 능숙한 집도(執刀) 아래 학교 교실 안에 간이로 마련된 진료실에서 결국 건강한 사내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산모는 불과 2시간여 뒤 갓 태어난 셋째 아들을 안고 약을 타 집으로 돌아가 주위를 경악케 했다. 필리핀 여성들은 최소 3명에서 많으면 10명 정도 자식을 낳는데 출산이 유세를 부릴 만한 일이 못 된다고 했다. 이날 분만에 남편은 없었다.
이틀간 진행된 의료 봉사에서 치료를 받은 현지인은 1000여명에 달했다. 대다수가 돈이 없어 제대로 된 병원 혜택을 누리지 못 한 터라 질병의 정도는 심각한 편이었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백발의 노인은 오른쪽 다리가 절단 직전까지 부패가 진행돼 주위를 안타깝게 했고 이가 지독하게 썩어 열악한 진료소에도 불구하고 발치를 할 수밖에 없던 어린이도 눈에 띄었다.
간혹 약을 받아 가기 위한 '꾀병' 환자도 있었지만 가정 내 상비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이기에 적당히 나눠줬다. 특히 기자가 담당했던 약국에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버린 약통과 종이를 줍고 싶어서였다. 내다 팔면 용돈벌이를 할 수 있다며 6~7세로 보이는 어린 친구가 한 박스 가득 챙겨가는 모습은 콧등을 아리게 했다.
행사를 공동 주관한 열린의사회 사무국 장석규 과장(32)은 "의료 봉사는 '중독'과 다름없다"면서 "시작은 몇몇 의사와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봉사단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국경과 종교, 정치적 이념을 떠나 인도주의에만 입각해 사랑의 의술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린의사회는 몽골과 중국, 우즈베키스탄, 인도, 에티오피아 등 해마다 10회 이상 해외 진료 활동은 물론 매 주말마다 국내 소외계층과 농어촌 어르신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케손(필리핀)=김혜원 기자 kim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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